[충청의창] 이강록 우송대학교 교수

‘오징어게임’이 일으킨 전세계적 파장은 몇 년이 지난 지금에도 대단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K-POP은 전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고 영화와 드라마와 같은 다양한 콘텐츠들이 외국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오징어게임’ 만큼의 선풍은 일지 않았다. 어쩌면 하나의 콘텐츠가 전세계적으로 광풍을 일으킨 것 자체가 세계사적으로 매우 드문 일이기도 하다.

‘오징어게임’을 포함해 한국 영화 드라마 콘텐츠가 그런 쉽지 않은 결과를 낸 이유는 이미 세평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서사 콘텐츠는 어떠한 주제도 다룰 수 있는 한국적 개방성과 리얼리즘의 풍토를 기반으로 한다. 미국을 제외한 대개의 국가들이 그렇듯 문화산업이 관주도 정책에 기대어 출발했지만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기조 아래 독자성과 자율성을 스스로 획득해낸 것이다. 거기에다가 감독, 연출, 작가와 같은 제작진의 수준이 높아 기법이 매우 고도화 되어 있고 창의성과 다층성을 갖춘 매우 매력적이고 풍부한 서사를 갖추고 있다. 거기에다가 연기자의 수준이 매우 높아 전세계적 팬덤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필자는 좋은 작품들이 갖춘 한국 콘텐츠가 가진 다층적 서사에 관심을 두고 보는 편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드라마든 좋은 서사는 통일성을 해치지만 않는다면 다층적이고 함축적일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오징어게임’은 양극화에 대한 고발적 성격을 가진 서사이기도 하고 서바이벌 장르의 장르적 특색도 담고 있으며 수사 스릴러물의 서사, 일확천금의 사행심의 욕망을 자극하는 서사, 기훈(이정재 배우)의 입장에서는 상처가 크기는 하지만 성공의 서사이기도 하다. 오일남의 관점에서 보자면 유년의 원형적 행복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노인의 서사이기도 하며 죽음을 앞둔 시한부 부자 노인이 죽음의 불안 앞에 자신을 던지고 새로운 각성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서사가 될 수 있다.

목숨을 건 게임에 참가하려는 가난한 참가자들의 각오와 열의가 대단하듯 게임을 주관하는 시한부 노인 오일남(오영수 배우) 역시 게임에 대한 열의가 높다. 그는 그를 내리누르는 권태와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에 몸을 던진 것이다. 물론 그는 다른 참가자들을 속이고 있으며 처지도 다르다. 그러나 그가 이 게임 속에서 찾으려 하는 어린 시절 즐거움의 회복에 대한 갈망에 가족과 인간적 관계에 대한 갈망이 더해지면서 그가 이 목숨을 건 게임에 대한 진정성이 있음을 보여 준다.

오일남은 자신의 임종의 날, 기훈을 불러 기훈이 번 돈에 대해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 드라마에서 오일남이 자신의 쾌락 때문에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잔인한 살인 게임을 즐기는 괴팍한 노인임을 확신시키려는 듯한 그런 장면이다. 그런데 그러고는 아직도 기훈이 사람을 믿고 있는지를 무척이나 알고 싶다는 듯 반복해서 묻는다. 임종 무렵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묻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리에 쓰러진 걸인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지를 가지고 기훈과 마지막 게임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이만하면 오일남이 이 잔혹한 살인 게임의 최악의 빌런으로만 남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임종을 앞둔 그가 유년시절의 순수한 즐거움을 다시 맛보게 해준 것은 살인게임이 아니라 기훈이 있어서라는 말을 한다. 기훈에게 숨이 잦아드는 동안에도 계속 묻는 “아직도 사람을 믿나?”라는 질문은 기훈의 어리석음을 질타하는 말이라기보다는 기훈의 확신을 통해 사람은 믿을만하다는 것을 오일남이 확인하고 싶어 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기훈과의 마지막 게임의 실제 승부는 중요치 않게 된다. 기훈이 사람의 선의에 대한 확신을 잃지만 않는다면 오일남은 기훈에게서 듣고 싶은 충분한 답을 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년이 지난 드라마 ‘오징어게임’과 같이 좋은 한국 드라마를 반추하는 이유는 이런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쏠쏠한 맛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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