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겨울비 내리는 날 수십 년 지기인 친구와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전화하게 되면 상투적으로 하게 되는 첫마디가 ‘별일 없지?’다. 평소라면 ‘별일이 좀 있어야 하는데 별일이 없다’라며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너무 지루하고 밋밋하다는 식의 농담을 주고받고는 했는데 그런 흔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친구에게는 별일이 있었다. 평소 긍정적이고 자신감 있어 주위에 힘이 되던 친구였는데 자식이 겪는 해결이 쉽지 않은 일로 많이 힘들어했고 지쳐있었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상황을 겪는다. 갈망하며 기대하던 상황이 오면 기쁨에 차 행복해하지만, 원치 않고 피하고 싶은 상황을 겪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고 넘어가 후회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어 괴로운 경우도 있다. 살면서 겪는 마음고생이나 괴로움은 이 모든 경우에 발생한다. 원하는 상황은 생각처럼 쉽게 오지 않고 피하고 싶은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되기 때문에 생기는 괴로움이다.

어렵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닥쳤을 때 그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면 인류의 삶은 아마도 더 보잘것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인류는 진화를 거치며 원치 않고 피하고 싶은 상황을 만났을 때 이를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자가 치유 방법을 만들어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이론이 이것이다. 자신의 태도와 행동이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다고 느끼는 불균형 상태가 인지부조화이다. 이렇게 욕망과 현실이 서로 모순되어 불균형 상태가 되면 자신의 인지를 변화시켜 상황을 해소하고 조화 상태를 유지하려 한다는 주장이 인지부조화 이론이다. 이를 자기합리화라 할 수도 있고, 어쩌면 정신 승리라 할 수도 있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인간이 느끼는 감정은 어떤 상황의 문제가 아니라 그에 대한 해석의 문제일 것이다. 불가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처럼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같은 물도 목마른 사람과 물고문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이다. 그러니 힘든 고통의 상황도 시각을 달리하고 해석을 달리하면 그 상황을 달리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인간 승리가 되기도 하고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되는 삶의 진실일 수도 있다. 미국의 저술가 비비안 그린은 ‘삶은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피할 수 없는 역경이 닥쳤을 때는 기껏해야 고통을 견디며 숨죽여 그 상황이 지나가길 견디는 게 보통의 경우이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 속에서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찾으려 적극적으로 마주한다면 삶은 훨씬 풍요로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세상을 점령했던 겨울의 차가웠던 땅에 봄이 지척임을 알리는 비가 내린다. 지난 계절은 이제 허겁지겁 짐을 싸고 물러날 준비를 한다. 따뜻한 곳에 앉아 차가운 바깥을 내다보며 안도하고 있던 사람들도 이제 밖으로 나올 것이다. 모든 것을 치유하는 시간의 마법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부른다. 힘들어하는 친구의 겨울에도 봄이 왔으면 좋겠다. 힘든 날들이 닥쳐야 별일 없어 지루해하던 그저 그런 밋밋한 날들이 얼마나 행복한 날들이었나 생각하게 된다. 친구와 같이 다시 그렇게 밋밋하고 나른한 봄날을 함께 맞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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