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보며] 안용주 전 선문대 교수

총선(總選)을 향한 시계 바늘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이번 선거의 목적은 비교적 선명하다. 현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제대로 대통령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선거다. 채 2년이 안된 윤석렬정부가 마치 20년 된 정부처럼 피로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국민이 있는가 하면, 1/3정도는 변함없이 엄지 척이다.

선거(選擧)는 제도적으로 지역을 대표할 사람을 인구 수에 비례해서, 할당된 인원만큼 지역주민들이 선출하고, 국회라는 공식적인 기구에서 지역주민을 대신해서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대의 민주주의에서 글로벌하게 인정받은 방식이다.

왕정시대는 왕(王)이라는 절대자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시대를 말한다. 한반도에서는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조약 발효일, 1910년 8월 22일 한일협합조약 조인) 이전까지인 고려, 조선, 대한제국시대까지가 모두 王에 의해 통치된 절대왕정시대였다. 말하자면, 국민을 다스리는 사람은 세습적 귀족에게 부여된 특권으로 당연시되던 시절이다.

‘선거는 민주적인가’라는 책에서는 ‘추첨(抽籤)’이라는 제도가 17, 18세기까지 정치문화에서 중요한 제도적 대안으로 남아있었다고 기술하며, 이탈리아 도시 공화국들은 선거와 추첨을 나름의 이유와 방식에 의해 배합하며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베네치아는 대표적인 선거공화국이었지만, 피렌체에서는 주로 추첨에 의해 공직자를 선발했다고 한다. ‘평등의 원칙’을 적용한다면 ‘선거’보다는 ‘추첨’이 훨씬 공평한 기회를 보장하는 것 아닌가?

저자에 따르면 추첨이 ‘평등의 원칙’을 구현하는 방식이라면, 선거는 ‘탁월성의 원칙’을 구현하는 방식으로 인식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탁월성(卓越性)’의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탁월(卓越)하다’는 의미는 ‘남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어떻게 보면 탁월성 원칙은 사회적 계급이나 재산적 의미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정신적 탁월성이 마치 태어날때부터 부여받은 재능으로 착각할 수 있지만, 사실상 사회적 지위와 부(富)에 따른 교육(敎育)과 친교(親交)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흡수합병된 한일병합조약(식민지조약)을 만든 장본인으로 한국에서는 을사5적(이완용, 이근택, 박제순, 이지용, 권중현)과 일본대표는 누가 뭐라고 해도 이등박문(伊藤 博文, 이토 히로부미)이다. 이완용은 대한제국을 일본에 팔아치운 댓가로 일본으로부터 은사금(恩賜金) 15만엔(현시가 30억원)과 백작(伯爵)이라는 작위를 받았다. 나머지도 10만엔(20억원)씩을 챙겼으니 을사5적은 110억원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일본에 팔아넘긴 것이다.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때, 일본의 앞잡이가 된 사람들은 막대한 부(富)를 형성하고, 그 돈으로 자녀들을 해외로 유학시켰다. 이들은 막대한 ‘부(富)의 대물림’을 활용하여,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고, 교육과 친교를 통해 탁월성 원칙을 획득했다. 이들은 다방면에서 사회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신분을 만들었고, 식민지가 된 조국을 떠나 독립을 꿈꿨던 독립투사들의 후손들은 국가에 버림받고, 제도에 발목잡혀 이렇다한 탁월성 원칙을 지닐 수 없는 신분(身分)이 된것이 당연했다. 오죽하면 ‘친일(親日)하면 3대가 흥하고, 반일(反日)하면 3대가 쪽박찬다’는 말이 회자되었겠는가.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는 총5207명의 인명이 수록되어 있다. 매국(賣國)파트에 21명의 이름이 자랑스럽다. 언론출판분야에는 이름높은 분들이 다수 계시다. 언론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이름은 조선일보 9대 사장 방응모씨다. 2010년 손자 방우영씨가 ‘방응모 전 사장이 친일행위를 한적 없다’며 정부에 친일반민족행위결정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에서는 끝내 방응모씨를 친일파로 판단했다.

우리는 종종 착각을 한다. 선거를 통해, 후보의 과거 행적을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이다. 이런 회고적 판단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선결되야하는 조건이 있다. 하나는, 결정권자에 대해 명확하게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해야 하고, 둘째는 책임 있는 자를 면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해야 하며, 셋째는 현직에 있는 사람이 경쟁자가 사용할 수 없는 수단은 사용할 수 없게 해야한다.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은 현재 책임을 물을 수 없다. 면직시킬 수도 없다. 경쟁자에 없는 수단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현 대통령은 입법, 사법, 행정 가운데 적어도 입법부에 대해서는 영향력이 미미한 상태다. 이번 총선은 그런 점에서 매우 시의적절하다. 현 대통령이 대통령의 직무와 역할을 잘 하고 있고, 살만한 세상을 만들고 있다면 입법부까지 장악할 수 있도록 여당의석을 몰아주면 된다. 반대로, 남은 3년이 걱정되고 살기 어렵다면 입법부 영역을 야당의 몫으로 남겨둬야 한다.

선택은 국민의 몫이고, 그 결과는 오롯이 본인의 책임이다. 주변과의 친소관계를 떠나 살만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선택의 시간이다. ‘경제는 보수가 낫다’는 조작된 신화에서 벗어날 때다.

당신에게 묻습니다. 지금 살만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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