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 당권 투쟁 움직임

柳珍山(유진산) 총재가 신병으로 70여 일 黨務(당무) 一線(일선)에서 물러나 있음에 따라 新民黨(신민당) 내부에선 黨首職(당수직) 후계 문제를 둘러싼 黨權(당권) 鬪爭(투쟁)의 움직임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高興門(고흥문), 金泳三(김영삼) 부총재와 李哲承(이철승) 국회부의장 등 黨內(당내) 系譜(계보)의 지도자들은 최근 所屬(소속) 議員(의원)들과 빈번한 접촉을 갖고 있으며 鄭一亨(정일형)씨도 金元萬(김원만) 부총재와 만나 黨首 경쟁에 나설 의사를 비쳤고 辛道煥(신도환) 사무총장도 몇몇 議員들과 후계 문제에 관해 의견 교환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黨首 경합자로 예상되는 鄭一亨, 高興門, 金泳三, 李哲承씨 등도 표면적으로 총재가 와병 중인데 黨權 문제를 꺼낸다는 것은 人道的(인도적)인 면에서 있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으나 個人事務室(개인사무실)을 중심으로 所屬 議員 포섭 및 組織(조직) 점검 작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같은 일련의 움직임은 臨時全黨大會(임시전당대회)를 소집하여 黨權 改編(개편)을 시도하려는 것 보다는 所屬 議員들을 포섭, 세력을 확장하여 黨首 후계문제가 대두될 때를 대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8949·1974326일자 1>

 

화무십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 했다.

50년 전 기사를 보니, 그 경구가 지니는 의미를 알 듯하다. 한때 야당 당수를 지냈던 이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했던 이도 그 지난했던 정치 역정을 뒤로 하고 모두 영면에 들었다.

유진산(柳珍山)3·4·5·6·7·8·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신민당 총재 등을 역임했다.

충남 금산 출신이다. 와세다대학 재학 당시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됐고, 광복 후 청년운동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다.

이에 앞서 5·16 군사정변 때에는 55일간 마포형무소에 구금됐고, 1962년 박정희의 3·22 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는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도했다.

1967년 야당통합을 이룬 신민당 부총재가 됐으며, 1970년 신민당 총재에 당선되면서 야당가의 총수로 등극했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별세했다.

그는 권모술수에 능하다고 해서 권모술수의 화신이라는 평가를 얻었고, 정적(政敵)과의 타협에 철저하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는 합리주의자라고 해서 사쿠라라는 별명을 얻었다.

김영삼(金泳三)은 초등학생들도 알만한 인물. 대한민국 14대 대통령이다.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이래 9선 의원을 지냈으며, 김대중과 함께 한국 정계의 주요 지도자로 인정받았다. 19903당 합당을 통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했으며, 199214대 대통령으로 당선돼 문민정부의 문을 열었다.

재임 초기 하나회 척결, 금융실명제 실시, 공직자 재산공개 등 개혁적 조치를 취해 국민적 인기를 얻었으나, 임기 말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융을 받는 경제적 위기 상태에서 김대중 정부에게 정권을 물려줬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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