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우리 집 좀 그려줘. 저녁이 어스름하게 내리는 여름날, 밥 먹으라고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집으로 뛰어가고 있었지. 수문장처럼 서 있는 느티나무 두 그루 사이를 지나다 섬뜩해서 올려다보면 구렁이가 나무 사이에 척 걸려 있는 거야. 헐레벌떡 대문 앞에 다다르면 왼쪽으로 우물이 있어. 산에서 흐르는 물이 우리 우물로 들어오는지 늘 물이 솟고 또 늘 흐르는 우물, 여름에는 참외가 둥둥 떠 있고 어느 날은 오이도 떠 있지. 그 우물에서 엄마는 열무를 씻고 쌀을 씻었어.

산 아래로 일찍 내려온 눈이 마당에 소복하게 쌓이고 밤은 깊어지는데, 상배네 집으로 놀러 간 어머니는 아직 안 오시네. 사랑방에선 아버지가 새끼를 꼬며 가끔 기침하는 겨울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숙제를 다 하고도 할 일이 없어 천정을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 그때, 멀리서 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와 화들짝 놀라던 그 집을 그려줘.

아니, 우리 동네도 그려줘, 동네 이름이 ‘성터’니 어딘가 전쟁 때문에 쌓은 성의 흔적은 있을 테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 그려, 낮은 산 아래 옴닥옴닥 초가집이 붙어있는 동네, 그리고 그 집도 그려줘. 기와집, 기품 있던 기와집이 지금은 다 허물어졌고 마당엔 풀만 우거져 있는 우리 옆집, 우리 동네에 교회를 세웠다는 집이야.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가 되면 늘 떡과 과자를 얻어먹은 교회. 눈 감고 기도하라 하면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는 척하면서 옆 친구와 키득거렸던 교회를 세운 집.

그리고 그 집 아들, 나보다 2살 위인 형은 서울서 공부하다가 방학이 되면 내려왔지. 공부하던 전과와 수련장을 내게 주었어. 그러면 나는 연필 자국을 지우개로 싹싹 지우고 보물을 얻은 양 그것으로 공부했지. 내가 늘 1등을 놓치지 않은 이유란 생각을 했어. 어찌 된 일인지 얼굴 갸름하던 누나도 죽고 혼자 살던 할머니도 아들 따라가더니, 땅을 다 팔아먹고 망했다는 소문에 집마저 무너졌지. 기왓장 아래서 굵은 구렁이가 네 마리 나왔다는 그 집. 그 형을 그려줘.

왜 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는지 몰라. 나이를 먹어도 꿈에서는 세월이 없어. 그 집에서 그대로 살지. 엄마는 늘 부엌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나는 대문으로 들어갈 시간을 아끼느라 측백나무 울타리 사이로 난 개구멍으로 들어가 부엌으로 뛰어들었지. 첫 말은 언제나 “엄마! 야. 엄마!” 그런데 말이지 그 엄마가 흙이 되고 모래가 되었어도 꿈에서는 늘 살아계셔. 그 엄마의 엄마가 또 흙이 되고 모래가 되었어. 그리고 우리는 그 위에서 살아가지. 또 어려움도 겪고 조난하여 구조를 기다리기도 하지. 그러면 또 엄마를 찾아. 어린 왕자가 어린 양을 찾듯이.

“내 양을 그려줘” 어린 왕자가 말하지. 사막에 불시착하여 일주일 치 물밖에 없는 상태에서 혼자 비행기를 고치고 있는 주인공에게 뜬금없이 나타난 어린 왕자의 어리광을 듣고, 그는 아무 말 없이 상자에 들어있는 양을 그려주는 이야기지. 그가 양을 그리는 순간은 아무 걱정이 없어.

오늘 나도 어린 왕자처럼 부탁할게. 그래!, 내 집을 그려줘, 내 양을 그려줘, 내 엄마, 내 친구를, 옆집 형을 그려줘. 구렁이가 나무 사이에 팔을 두른 듯 척 걸쳐 있는 느티나무와 엄마가 나물을 씻는 우물과 아버지가 헛기침하는 사랑방도 그려줘. 누나가 시집가기 전날 광에 걸어놓은 삶은 돼지고기를 내 친구들과 싹뚝 잘라다 먹던 사랑방이야. 부탁이야. 내 집을 그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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