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end] 2007년 3월 30일


< 보은 삼년산성 >

그해 여름, 산수풀 사이로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르고 백제 병사들의 낮은 포복이 시작됐다.

고향으로 달빛을 담아 편지를 쓰던 신라의 군졸들이 백제병사들의 기습에 전열을 재정비하고, 싸움은 그렇게 또 시작됐다. 150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삼년산성의 달빛은 고요하기만하다.
그러나 세월에 인종하며 살아온 이 지역 사람들에게 삼년산성은 이미 또 하나의 삶이 돼버렸다.

신라시대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삼년산성(三年山城).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 산1-1 오정산 정상에 웅장하게 남아있는 이 성을 오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보은읍에서 속리산·상주로 향하다 보면 보은군청 너머로 보이는 성이 바로 현존 최고(最古)의 성인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이다.

삼년산성은 신라 자비왕 때 경주중심의 동남부 해안지방에서 한강유역으로 진출을 도모하기 위해 3000 명의 신라군사들이 3년 동안 쌓았다고 전해진다. 백제와 국경지대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이성을 빼앗겨 본적이 없다고 전해진다.

고려의 태조 왕건이 918년 고려의 영토를 넘어 북진하려는 견훤을 치기 위해 이곳까지 왔으나 대패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석축기법 사용 … 다행히 원형은 남아

보은정보고를 끼고 성주리 마을을 지나면 바로 삼년산성의 서문에 이르게 된다.

삼년산성에는 원래 4개의 문이 있었다. 이중 서문은 바깥쪽으로만 문이 열리도록 꾸며져 있다.보통 성의 큰 문은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열도록 만들어진 것이 많다.

그러나 지난 80년 이곳 서문 자리에서 발견된 기둥 받침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열도록 설치돼있다.

삼년산성이 군사요충지였기 때문에 아마도 신속한 성 밖 돌격을 감행하는데 이같은 형태의 문이 더 유리했기 때문에 이 형식을 취하지 않았나 싶다. 또 성문 안쪽으로 연못이 설치돼 있는 점도 적군이 성문을 열고 진격했을 경우 연못으로 바로 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동문과 북문 앞에는 보조석축을 쌓아 이중꺾임 구조를 갖췄으며, 북문은 성벽 가운데 설치해 5m 이상의 사다리가 없으면 접근이 어렵도록 했다.

신라 북진 난공불락 의 요새

삼년산성은 그물처럼 얽혀져 있다. 자연석을 아래 위로 평평하게 하게 잘라 가로와 세로로 엇물려 차곡차곡 쌓았다.안쪽면과 바깥쪽면 사이에 돌을 채워놓고 철처히 수평을 유지토록 해 무너짐이 없도록 했다.

오랜세월이 흘렀어도 삼년산성이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이 같은 석축 기법 때문인 듯 싶다.

문이 없는 서문을 들어서면 암벽에 아미지(蛾眉池)라는 글자가 음각 되어 있어 이곳이 보통 늪지는 아님을 말해준다.

그러나 현재는 아쉽게도 삼년산성 복원 및 연구자료 때문에 원형을 찾아보기가 쉽지않다. 이곳에서 돌계단을 타고 성벽을 오른 후 주위 경관을 조망할 수 있다.

보은읍이 먼저 눈에 들어오고 한 계단을 더 올라가면 마치 문티재를 넘어 백제 땅(옥천)이 보일 듯 싶다.또 한 계단을 오르면 이제는 한반도의 비무장 지대까지 보일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동문을 향해 계속 걷다 보면 성 안의 물을 밖으로 보내는 데 이용되던 수구를 찾을 수 있다. 물론 그저 걷기만 해선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성 안쪽은 이미 무너져 버린 지 오래고, 수구는 성 바깥쪽에 나 있기 때문이다.한 때는 이 수구가 적군에게 성을 빼앗겼을 때 장수들이 탈출하던 비밀 통로라고 해 ‘장수굴’로도 불렸다.

답사 전에 수구가 어디쯤 있다는 것을 미리 조사해 가면 편할 것이다.아무튼 수구는 성벽이 지표면과 만나는 곳에서 약 1m 높이에 성벽에서 약간 돌출된 채로 남아 있으며, 그 동쪽에서는 가로 45cm, 세로 65cm의 크기의 오각형 수문도 볼 수 있다.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동서울·남서울⇒청주⇒보은(삼년산성)⇒장안(선병국가옥)
승용차:경부고속도⇒옥천ic·청주ic보은(삼년산성)⇒상주방면 장안(선병국가옥)
위치:보은읍에서 속리산·상주방면으로 가다 군청을 지난 뒤 보은정보고가 있는 성주리 마을에서 우회하면 삼년산성까지 도로연결 돼있다.
삼년산성에서 상주방면으로 승용차로10분정도 달리면 외속리면 하개리 선병국 가옥이 보인다.

둘러볼만한 곳
삼년산성⇒선병국 가옥⇒외속리면 장내리 동학취회지⇒서원계곡⇒삼가조수지⇒구병리 아름마을⇒정이품송⇒속리산⇒북실 동학혁명공원⇒비림원

【먹을만한 음식】
속리산 산채 비빔밥, 보은읍 순대골목



< 선병국 가옥 >

삼년산성을 내려와 상주 쪽으로 차를 몰고 10여분 달리면 외속리면 하개리에 99칸 짜리 선병국 가옥(국가 중요민속자료 134호)이 있다.

소나무 숲에 가려 도로에서는 잘보이지 않지만 속리초등학교 정문을 찾으면 금방 눈에 들어온다.


1919~1921년 하개리 마을에 지은 전통가옥으로 선병국씨가 소유·관리인으로 있다.

이곳은 속리산에서 흘러내리는 삼가천(三街川)이 큰 개울을 이루고 개울 중간에 삼각주를 이루어 섬이 된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이며,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고택은 안채·사랑채·사당의 3공간으로 되어 있으며 안담으로 둘러싸고 다시 바깥담으로 크게 둘러쌌다.대문은 솟을대문이고 오른쪽과 왼쪽으로 행랑채가 서 있다.

행랑채 끝에는 사랑채로 들어가는 중문채로 이어지고 중문은 솟을삼문형이다.사랑채는 남향으로 무사석같이 다듬은 세벌대 위에 있다.
사당채는 멀리 떨어진 곳에 낮은 담장으로 둘러싸고 삼문을 열어 출입하게 하였으며 사당 3칸에 재실 3칸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당대 제일의 목수들을 뽑아 이상형으로 집을 지었다고 하는데 개화의 물결을 배경으로 새로운 한옥의 완성을 시도한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집이다.현재 고시원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사랑채는 찻집이다.

얼마 전 이 집의 씨간장을 부어 만든 덧간장 1ℓ가 ‘350년 묵은 간장’이라 하여 한국골동식품예술전에 초대되었다가, 한 대기업 회장집에 무려 500만원에 팔려나가 세간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043-540-3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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