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청주의 한 방송국에서 "청주팔경을 아십니까?"라는 제목의 프로를 방영했다. 이 프로가 방영된 후 청주시민이서원팔경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됐다.

첫째 팔경 8개의 각각의 명칭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 제1경 상당귀운(上黨歸雲) 제5경 석교석구(石橋石狗) 제2경금천어화(金川漁火) 제6경 동장철학(銅檣鐵鶴)

제3경 선루제월(仙樓霽月) 제7경 우산목적(牛山牧笛) 제4경 봉림조운(鳳林朝雲) 제8경 낙가석조(洛迦夕照)

둘째 지명을 명명하는 원칙, 괴산군 사리면 화산리 도촌떡바위,칼잔등,군자구곡 사장봉 장승백이.

셋째 문학작품속에 활용한 비유적 표현은 실제 사실을 근거로했다.정몽주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조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겉이 검은 들 속조차 검을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뿐인가하노라. '토사구팽' 이라는 비유도 그 당시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단서다.

용두사철당기에 "그 형상은 학(鶴)이 푸른 하늘을빙돌아 날아오르고, 용(龍)이 푸른 하늘을 뛰는 것 같다"고 했다. 당시 청주에 사는 당대등 김예종이 질병에 걸렸는데,철당간을 공경스레 제조하고 용두사를 장엄하게 꾸미기로 부처님께 약속했다. 이렇게해서 건립된 것이 용두사 철당간이다. 아마 그는 용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전지전능한 동물천년을 산다는 동물 장수를 상징한다. 용두사를 건립하고 철당간을 실제 사실 무근한 비유는 하지 않는다.

넷째 절의 이름이 용두사라고 해서 반드시 용두가 있는가? 절의 이름이 용두사가 아니라해서 용두가 없는가?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전국에 존재하거나 폐사된 절 가운데 '용두사'라는 절은 적지 않다.

다섯째 청주지방에 거주했던 학자들이 지은 시를 통해 살펴보자.당간 갯수금동 당간 용두간두(竿頭)에는 봉황두(鳳凰頭) 장식을 하였다고 하나 그 예는 없고,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에서 발견된 금동제 당간용두식(金銅製幢竿龍頭飾) 보물제1410호 1910년 한일합방이 되어 관찰부 대신 도청이 청주에 설치되었고, 1911년 4월 착공해 1915년에 마친 시구 개정사업을 명분으로 하여 먼저 사방의 성벽을 헐어 그 돌을 이용해 하수구를 만들고 남석교에서 일직선으로 남문을 경유하여 북문으로 통하는 간선도로 즉 성안길(중앙로)을 개수했다.

다음 박노중(朴魯重 1863~1945)의 동장(銅檣)이라는 시를 살펴보자.

마도교남운만리(馬到交(嶠: 인용자)南雲萬里), 말은 영남(嶺南)에서 오고 구름은 만리를 떠가고, 학귀화표월삼경(鶴歸華表月三更). 학은 화표(華表)로 돌아가는데 달은 삼경(三更)으로 가네.천고동주유장람(千古銅柱留壯覽), 천고(千古)의 동주(銅柱) 장엄한 볼거리로 남아있는데,낭성지세사주행(狼城地勢似舟行). 낭성(狼城)의 지세(地勢) 배가 떠가는 것 같다네.시 3구를 보면 쇠로 만든 학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원팔경이 최초로 기술된 책은 1932년에 이병연(李秉延 1894∼1977)이 발행한 '조선환여승람'이다. 동장철학(銅檣鐵鶴)은 서원팔경으로 설정될 만큼 특이한 조형물이었다. 이때까지 존재했던 철학이 누군가의 손을 탔다. 이 기회에 청주시민의 자존심과 문화의식을 고조시키기 위해서라도 그 철학의 행방을 찾는 시민운동이라도 벌여야겠다.

현장을 확인하지 못하고 전해들을 내용을 기록했을 수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서원팔경이 설정된 최하한연도는 1923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상주 중원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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