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어도 십일월에는'이라는 소설을 아시는지. 1950년대 초 독일 작가 한스 에리히 노삭의 쓴 유명한 연애소설인데, 순전히 그 제목 때문에 오래전부터 읽어야 할 책 목록으로 가지고 있다가, 2년전 가을에 읽은 바 있다. 소설은, 어떤 문학상 시상식장에서 그 행사주관사 대표의 부인으로서 남편 없이 참석한 여주인공 마리안네가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는 젊은 작가 베르톨트를 만나 운명을 느꼈다며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는 일로 시작한다. 그동안의 가식적 삶에 대해 불만과 무료함을 느끼고 있던 그녀는 베르톨트를 처음 만난 사이지만 그날 밤으로 남편이 보는 데서 짐을 꾸려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 국경근처까지 무작정 가서 이십여 일을 함께 지낸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옳았던 것인지 죄책감에 시달리며 갈피를 잡지 못하던 중, 수소문해서 찾아온 시아버지의 방문에 "함께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 베르톨트를 버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11월이면 베르톨트가 쓴 희곡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고, 원고료를 받으면 낡은 폭스바겐을 하나 사서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자고 했던 두 사람은 헤어진 채 몇 개월을 보내는데, 마리안네는 아무런 질책 없이 자신을 받아준 남편에게 전과 다름없이 대하며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리고 그 연극이 상연되는 날 찾아온 베르톨트와 함께 낡은 폭스바겐 차를 타고 목적지 없이 가다가 기차에 부딪쳐 함께 세상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십일월이 지나간다. 풍요롭던 들판도 비었고, 잎새들도 다 떨어져 산에는 낙엽이 푹 쌓였다. 그렇게 겨울로 향한다. 지난 시월 하순 경 교회에서 새벽기도 메시지를 전하는 기회가 되어, 「TO DO LIST (할일 목록)」이라는 제목으로 교우들과 생각을 나눈 적이 있다. 두 달 밖에 남지 않은 시간에, 한 해를 돌아보아 계획했던 일 중 제대로 마친 것과 못 마친 것을 돌아보고 못 다한 일들을 마쳐서 한 해를 잘 마무리하자는 내용이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 진행중인 사건 정리, 오랫동안 못 만난 분들과의 식사 약속, 골프 약속 등으로 매일을 분주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아직 따뜻한 날씨 탓에, 다른 이들이 '겨울의 문턱' 운운하는 말을 쓸 때 나는 그런 표현을 삼가달라고 하기도 했다. 마냥 따뜻한 만추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인들과 못 다한 골프도 더 하고, 읽고 싶었던 책도 더 읽고, 산에도 더 가고, 몇 개 남지 않은 가을 잎새들도 더 많이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두어 번씩 골프장에 나가고, 새벽에는 책도 더 읽고, 가까운 산에도 한 주에 두세 번 아침마다 다녀오면서 따뜻한 만추를 즐겼다. 그런데 웬 걸, 어제 아침부터 추워진 날씨는 옷깃을 여미게 한다. 드디어 겨울로 바뀌는가. 그 아침에 아늑한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창문을 열고 몰려드는 찬바람을 맞으며 이 안락함과 대비하여 추위가 고통스러울 이들의 삶이 생각나 잠시 눈물을 짰다.

겨울의 시작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여기저기서 김장담그기, 그리고 담근 김장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기, 사랑의 연탄나누기 등으로 따뜻한 정을 나누는 모습이 정겹다. 어느새 이 해도 한 달여 밖에 남지 않았구나. 지나온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온통 감사한 것뿐이다. 나는 베풀지 못했는데, 주위 분들은 나에게 한없이 베풀어 주었다. 그래서 이제 십일월, 조금씩 틈나는 대로 감사한 분들의 목록을 적어본다. 그 분들에게 연하장 한 장, 달력 하나라도 보내려 한다. 아니 그게 안 되면 안부전화 한 통이라도 걸어볼 생각이다. 단 몇 줄의 감사 글, 단 몇 마디의 감사 말이 세상을 훈훈하게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서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할 일도 적어본다. 그리고 확실히 끝맺을 것을 다짐해 본다. 오늘 새벽 교회에서 돌아와 TV를 켜니,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마지막 대회에서 박희영 선수가 우승하는 장면을 중계한다. 미국진출 4년 만에 올 마지막 대회에서 첫 우승을 차지해서 감격의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한 때 국내골프계를 휩쓸던 그녀가 동갑나기 라이벌 최나연·안선주 등이 미국, 일본 등지에서 상금왕으로 승승장구하는데도 한 번도 우승 못하다가 드디어 올 마지막 대회에서 우승한 것이다. 우리도 뭔가 시원한 결말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늦어도 십일월에는. 혹, 십일월에 못한다면, 정말 늦어도 십이월이 다가기 전에는.



/유재풍 법무법인 청주로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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