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의 무게보다 사람에 대한 무너진 신뢰가 가슴을 더 무겁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이런 일을 종종 경험 했었다. 어머니가 감자 한 상자를 동네 시장에서 사 힘겹게 머리에 이고 집에 와 보면 속엔 썩은 게 다수였었다, 열무를 몇 단 사갖고 집에 와 열무 단을 풀어헤쳐보면 겉과 속이 다른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땐 어린 맘에도 얄팍한 상술에 속은 게 분하여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자전거에 감자 상자를 싣고 시장을 쫓아가 멀쩡한 감자로 바꿔온 기억도 있다. 이런 상인들의 행태는 지금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과일의 경우 상자 위에만 굵고 때깔 좋은 것으로 진열하고 아래로 갈수록 크기가 작은 것을 섞어놓는 일은 부지기수다. 어디 이뿐이랴. 가짜 참기름, 고춧가루 등 먹는 것을 갖고 장난치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뉴스를 장식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다.

하지만 남에게 싫은 소리 하는 것을 꺼리는 나는 무거운 고구마 상자를 들고 재래시장 안으로 힘겹게 걸어가면서 고민해야 했다. 그 상인을 만나면'무슨 말로 상인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할까?' 를 생각하노라니 마침 그곳서 고구마를 구입한 시각이 저녁 시간이어서 주위가 어두웠음을 상기했다. 드디어 팔이 떨어지는 듯 한 아픔을 참으며 가까스로 가게 앞에 도달했다. 내 힘엔 부쳤던 10kg의 고구마 상자를 가게 앞에 내려놓으며 막상 상인의 얼굴을 대하노라니 아까와 달리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하여 상인이 손님들에게 물건을 다 팔 때까지 잠시 기다렸다가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 한 후 상인 곁으로 다가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 아주머니! 이 고구마가 호박 고구마가 아니고 일반 고구마였습니다. 아마도 어제 저녁 때라 미처 상자를 확인 못하고 제게 팔은 듯 하군요. 상자를 뜯어보고 제가 직접 확인했어야 하는데 아주머니 말만 믿고 가져간 제 불찰도 있습니다." 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분명 자신은 호박 고구마로 알고 팔았다며 변명을 늘어놓는다. 심지어 한 술 더 떠 오늘 호박 고구마 값이 어제 시세보다 3,000원 올랐으니 그 웃돈을 더 내고 바꿔가라고까지 한다. 이에 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소행까지 겹쳐 괘씸해서 그 웃돈을 줄 테니 택시 타는 곳까지 배달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 상인은 택시까지 타고 팔 아프게 상자를 들고 온 것을 미처 생각 못하고 웃돈을 달라고 했다며 미안하다고 사과해 온다.

이제 지난날 20여 년 넘게 거래 해 온 그 상인과의 인연은 그 일로 끝이 났다. 상인의 첫째 덕목은 품질 좋은 상품을 손님들에게 판매 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 한 게 정직이다. 그로인해 손님들과의 상호 신뢰 구축이야말로 가게를 번성하게 하는 지름길인 것이다. 한번 속지 두 번 속지 않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그녀는 대형마트를 일부러 피해 그곳을 찾던 20년의 단골 고객을 자신의 얕은 속임수로 인해 잃게 되었다.

진실은 두려움이 없다. 진실 앞엔 강한 적도 없다. 가장 두려운 적은 바로 진실을 은폐하는 자신인 것이다. 스스로 떳떳한 삶을 살 때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날 상인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이제 새해엔 주위에서 평상심을 잃지 않는 정직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누구보다 그런 정치인을 원한다. 속임수를 쓴 상인처럼 온갖 감언이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그런 언행의 정치인들에겐 질려서 신물이 나기 때문이다.

그릇된 관행 타파, 어떤 힘의 역학에 휘둘리지 않는 대담한 역의 논리로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할 줄 아는 고다이버이즘(godivaism)이 투철한 정치인이 속출하는 새해였으면 한다. 이런 바람은 정녕 정치판의 실정을 까맣게 모르는 여인네의 단순한 욕심일까?



/김혜식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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