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둘러 일정을 덮어놓고 북면 동생과 함께 청주 병원으로 향했다. 문자를 잘못 읽은 동생이 뒷좌석에서 눈물을 터트리자, 무슨 소식이냐고 묻지도 않고 함께 통곡을 하며 울었다. 겨우 병원에 있는 남동생과 통화가 되어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청주까지 가는 길이 멀고 서툴기만 했다. 수술실 앞에서 칠남매가 서성였다. 어두운 복도에서 수술실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안에 있는 엄마를 염려하며 세 시간 동안 우리는 아무런 말도 나누지 못했다. 그저 걱정하는 말이 사실이 될까봐 말을 아끼고 있었다. 예기치 않은 소식에 초췌한 모습으로 한밤중에 허위허위 달려와, 눈빛으로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는 서로의 손을 잡아주는 것만으로 서늘한 가슴을 쓸어 내렸다.

제각기 먹고 사는 일에 바쁜 평범한 살림살이다 보니 동기간에 우애를 다질 기회도 많지 않았다. 명절 때나 마음 놓고 만나 무릎 맞대고 화투놀이 하며 소소한 얘기 나누거나, 소주한잔 마시면서 서로의 안부를 짐작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저 소리 없이 제 역할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피차 고마운 형제지간이다. 성공한 동기간이 하나라도 있어서 구심점이 되어주면 착한 칠 남매가 더욱 끈끈해 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맏이인 내가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이다. 그 날 수술실 앞에서 나는 우리가 한어머니의 태를 빌어 나온 남매들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형제들이 엄마의 소식을 듣고 도착 가능한 시간대에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는 게 눈물겹게 고마웠다.

청주에 사는 여동생이 엄마의 회복을 도와주며 간병을 하였고 우리는 번갈아 건성건성 얼굴을 내미는 것으로 엄마가 쓰러지시던 날의 충격을 잊을 때 쯤 동생이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슴에 멍울이 만져지기에 이상하다 싶어 엄마 간병하다가 내친김에 진찰을 받았는데 그게 암이었다는 것이다. 그 애가 받았을 충격을 가늠할 수가 없어서 차마 여동생에게는 전화를 못하고 우리들끼리 통화하며 눈물을 훔쳤다.

엄마를 퇴원시키고 나서 동생은 항암 치료를 시작했다고 했다. 조심스레 안부를 물었다. 밝고 낭랑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동생이 믿어지지 않았다. 오진인가 했다. 유두근처에 종양이 있어서 종양을 줄인 다음에야 수술이 가능해서 먼저 항암 치료를 해야 한다며 남의 이야기 하듯 한다. 암환자에 대해 드라마도 보았고, 책도 읽었고, 이야기도 들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충격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부인하고, 저항하고, 원망하고, 그리고 슬퍼한다.

위로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며칠을 전화도 못했던 내가 오히려 당황했다. 정말로 괜찮은지 묻고 또 물었다. 까르르 웃으면서 "나, 안 죽어 언니" 그런다. 전화를 끊으며 목울대가 뻐근했다. 그 동생은 엄마의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변변치 못한 살림살이 때문에 늘 엄마의 걱정을 샀고 나 역시 어렵게 사는 동생이 마음에 걸렸었다. 초기라서 정말 대수롭지 않은가보다 생각하고 마음을 가볍게 먹게 되었다. 며칠 전 동생이 수술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주말에나 다녀오리라 생각하고 미루었다. 그리고 오늘, 결혼식에 하객으로 참석해 친구들 만나고, 초등학교 동창들과 함께 윷놀이도 신나게 하고, 오창에 가서 두 시간 특강 듣고, 내 할 일 다 하고 나서 어두워진 다음에 잠깐 병원에 들렀다. 병실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동생이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자 "항암치료하면 머리가 빠지는 거 몰라?" 그러며 모자를 슬쩍 들어 올려 파르스름한 머리를 보여준다.

아프지 않다고 밝게 얘기해 주기에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닌 줄 알았던 내가 바보였다. 가까이 얼굴을 들여다보니 눈썹도 없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거무스름하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몸을 보니 암환자이다. 말문이 막혔다. 혼자서 겪었을 아픔을 생각하며 울컥하자 밝은 목소리로 견딜 만하다며 바보 같은 나를 위로한다. 씨익 웃는 동생의 얼굴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읽는다.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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