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난 원인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세계의 사건인 것이다. 우리는 태어났을 때 “아아 어떻든 태어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는 것이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니 울음이 나온 것이다. 그리고 죽는 경우는 어떤가? 자살의 경우는 별도로 하고 우리는 죽으려고 생각하고 죽는 것이 아니다. 죽는 원인도 또한 우리와는 전혀 무관한 세계의 사건이다.

죽으려고 결심하고 죽는 경우는 죽는 것의 목적을 안다. 무엇 때문에 죽는가는 안다. 실연(失戀)의 괴로움에서 도피하기 위해 생활이 괴로워서····. 그러나 우리의 대다수는 자기가 죽으려고 생각하고 죽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엇 때문에 죽는가를 모른다. 죽었을 때에 “아아 겨우 죽었다.”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결의에 의해 태어나는 것도 자기 자신의 결의에 의해 죽어가는 것도 아니다. 태어나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계의 사건인 것이다. 공부하려고 결의하고 공부하고 있는 몸이고 보면 왜 공부를 하는가를 안다. 생명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삶의 이치를 알기위해 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무엇 때문에 공부하고 있는가를 안다. 그러나 우리의 출생과 사망은 우리가 원인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아 있는가.”라고 하는 이 영원의 과제 “무엇 때문에 죽어 가는가.”라고 하는 낡고도 새로운 문제를 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자기가 원인이 되어있는 것 밖에 그 목적을 알 수 없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 지금 자기는 살아 있다. 결코 죽으려 하지 않는다. 살려고 한다. 아니 죽으려고 생각해도 결코 죽지 않고 살아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체 살아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모르면서도 그래도 역시 살아있다.”는 사실 뿐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결코 모른다고 알고 있으면서 여전히 하려고 하는 것 그것자체도 또한 살아있는 것 중에 있다.

“우리는 살고자 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나의 출발점은 바로 여기다. 이것 이외에 나에 있어서 확실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라는 것을 발견하려는 일체의 노력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우리는 존재한다.”고 하는 확실한 점에서 출발해서 스스로 인생의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창조한다. 내 인생은 나의 것. 스스로 창조한 목적에 따라서 스스로 살 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가를 알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를 결코 타인에게서 배울 수는 없다. 그리고 또 결코 그것은 외부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 창조하는 것이다. 인생의 의미는 타(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살아가는 이외에 전혀 방법이 없다. 죽을 수 있으면 죽어도 좋다. 그러나 우리는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살아있지 않은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모르더라도 현재 당신은 살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는 결코 모르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인간은 의미를 가지는 것을 요구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우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가를 알고자 하고 그것이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를 요구한다. 전혀 무의미한 것을 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의미를 가지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의미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스스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자에게는 이미 사랑할 수 없다.”라고 하는 말이 마음에 든다. “애써 찾은 것도, 사랑한 일도 없고, 꽃향기를 찾은 일도, 즐거운 소리에 떨어본 적도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고 당나귀다.”누군가의 너무도 당연한 말이 아닌가!

도덕은 교통규칙 이상의 것은 아니다. 그것에 윤리성을 뒷받침 하는 것은 개인이다. 도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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