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혹한의 긴 겨울을 벗어나 만물이 생동하는 희망찬 새봄의 길목이다. 소리 없이 내리는 밖의 봄비가 그치면 머잖아 산하엔 녹색 털실꾸러미를 지천으로 풀어놓을 채비로 한창일 게다. 봄은 여인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벌써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에선 봄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듯하여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 한다. 어디 이뿐이랴. 올봄엔 겨우내 얼어붙었던 내 가슴이 봄의 훈기로 부쩍 달아올라 누구든 용서하고 사랑할 듯하다. 그래 올 봄엔비좁았던 내 가슴이 몇 뼘쯤은 그 평수가 넓어지리라.

설령 지닌 천성을 버리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가슴을 베이고 그 상처로 몇날 며칠 끙끙 앓는다고 하여도 봄은 그런 나를 그냥 방치하진 않을 것으로 믿는다. "보아라! 아기의 젖니 같은 연둣빛 새순이 나목마다 돋고 있잖니? 청춘 남녀들이 미래를 향해 웨딩마치를 울리는 소리가 안 들리니? 이웃집 철수가 그토록 원하던 회사에 취업을 했다는 새 소식도 들리지 않니? 자신의 몸을 낮춰 국민의 공복으로 충실히 일할 청렴을 생명으로 여기는 새 정치인도 머잖아 탄생하지 않니? 힘을 내라 힘을!" 라고 새 봄은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자꾸만 처지려는 내 어깨를 토닥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지난겨울은 인생 무대에서 배우로서 온갖 역할을 도맡으며 치열한 삶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는 우리들을 먼발치서 구경만 하였었다.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냉랭한 시선으로 겨울은 우리를 굽어보면서 자신의 할 일을 돌아올 새봄으로 미루기 예사였다. 젊은이들이 취업이 안 되어 실업자가 늘고 있는 것도, 고유가로 인해 치솟는 물가도, 전세 값 폭등도, 온갖 부정부패도 겨울은 어찌 할 바 모르고 수수방관만 해온 게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입지를 확립하기 위해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겨울의 혹한이라는 회색빛이 존재하기에 봄의 현란한 꽃들의 색깔을 얻을 수 있을 테고 매화 향기가 멀리 가는 현상도 혹한의 시련 덕분임을 알렸다."라는 무겁고 칙칙한 언어로 우리의 불만을 달래고 자신의 무능함을 눈 가리려 애썼다.

하지만 구경 중에 제일 좋은 구경이 싸움 구경이라는 『충북문학』 제35집에 게재된 시인 박태언의 시 <구경꾼>의 시어를 잠깐 빌리지 않아도 겨울은 참으로 그 인품이 옹색하고 잔인했으며 자신의 무능력을 변명하려는 몸짓이 치졸하기 조차하였다.

한 판 붙었다/ 뭐니 뭐니 해도 싸움 구경이 최고라 하던가/이리저리 역성드는 척 하면서 / 싸움을 부추기는 구경꾼 --하략--

그랬었다. 분명 겨울은 책임감도 사명감도 전혀 없이 우리의 고단한 삶을 팔짱만 낀 채 멀거니 서서 구경만 했던 게 사실이다. 돈 봉투가 이 주머니 저 주머니 옮겨 다니고 권좌의 측근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칼바람 속에서도 세상은 한바탕 밥그릇 싸움으로 늘 하루하루가 피비린내 났었지만 겨울은 내내 침묵 만 지켜왔었다. 아니 소생을 방해하는 특유의 특성을 정당화 하여 소멸의 갈무리에만 급급해 했다. 그래도 순박한 민초들은 으레 겨울은 춥고 음침하여 소멸의 계절이려니 이해했다. 그 예로 올해는 혹한에도 서울의 노숙자들은 얼어죽지 않았다는 게무슨 대수처럼 떠들기 바빴던 게 그것이다. 올핸 단 한명의 동사(凍死) 한 노숙 인이 없다는 통계의 수치가 그것을 증명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어찌 겨울의 무심함을, 능력의 한계를, 또한 박쥐마냥 싸움판 이리저리 붙었던 비굴함을 가릴 수 있으랴. 우리의 가슴이 혹한보다 바이칼 호(湖)보다 더 얼어붙었음을 무엇으로 보상하려나? 겨울은.

하여 겨울은 너무 가혹했다. 그리고 그 곁을 벗어나려는 우리 민초들의 가슴은 낙엽처럼 메말라 나중엔 물기라곤 한 방울도 없어 제풀에 바스라지고 말았다.

"바라옵건대 새로 온 구경꾼 봄이여! 우린 당신의 능력을 은연중 기대하며 당신을 맞이합니다. 전지전능한 당신의 눈길로, 훈훈한 당신의 입김이 닿는 곳 어디든 음습한 그늘도 걷히고 차디찬 인심도 따뜻하게 덥혀 가슴 가슴마다 이기심과 물신주의도 봄눈 녹듯 녹게 해 주소서. 올 봄엔 물질에 눈 어두워 부모를 해하는 자(者)도, 생활고(生活苦)로 자신의 자식을 죽임 시키는 모성의 비정함도, 어려워진 경제로 삶의 피폐함도 당신의 그 넉넉한 햇살로 흔적 없이 녹여서 모쪼록 올봄엔 만사형통(萬事亨通)의 대운(大運)을 국민들 앞에 대령 시켜주소서. 그리고 지켜봐 주소서. 우린 올 봄엔 다시 일어서서 꼭 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모습을 새로 온 구경꾼인 당신 봄에게 보여주고 말 것입니다. 기필코 꼭."



/김혜식 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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