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 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임금님이 그의 신하 한 사람을 임금님에게 빨리 오도록 명령한다.

그 신하에게는 세 사람의 친구가 있는데 한 사람은 절친한 친구이고 또 한 사람은 그렇게 가까운 친구는 아니며 나머지 한 사람은 더욱 가까운 사이가 아니다. 임금님의 부르심을 받은 그 신하는 혹시 임금님에게 야단을 맞을까봐 두려워서 세 사람의 친구에게 동행해 줄 것을 간청한다.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친구는 이 간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두 번째 친구는 동행을 하겠지만 대궐문 앞에 까지만 함께 가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평소에 가깝게 지낸 일이 없는 세 번째 친구는 의외로 “자네의 청이 그렇다면 함께 가주지.”하고 선뜻 응해준다.

'탈무드'에 의하면 첫 번째 친구는 “재산”이다. 사람들이 평소에 가장 가까이 지내는 것이지만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동행해주지는 않는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게 된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이다. 그도 역시 끝까지 동행해주지는 못한다.

그가 동행해줄 수 있는 한계는 결국 무덤까지 만이다. 평소에 사랑하는 아들,딸들 이지만 무덤까지의 동행이 전부이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에 끝까지 동행하는 것은 세 번째 친구이며 그것은 “선행”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난한 사람과 불쌍한 사람을 위해서 베푼 자선, 옳고 의로운 일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는 공의(公義)의 선행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원히 남고 따라서 선행은 재산이나 친척보다 더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어머니의 이런 이야기를 어린 시절에 들은 어린이들이 장차 자라서 어른이 되었을 때 그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친절과 선행에 대한 생각이 남게 된다.

이렇게 어려서 형성된 도덕적 가치는 이성적인 판단 이전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감정으로 작용한다.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자선을 베풀어야겠다는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이 도덕적 가치관이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과 어느 정도 나이가 든 다음에 형성된 것과의 차이점이다. 우리나라의 가정교육에서도 친절과 선행을 무척 강조하는 편이다. 매사에 있어서 착한 마음씨를 강조하고 어린이를 칭찬할 때도 “똑똑하다.”, “기특하다.”는 말보다 “착하다.”즉 선하다는 말을 더 많이 쓴다.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옛 이야기도 사실 그 대부분은 착한 마음씨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철저하게 권선징악(勸善懲惡)을 주제로 한 이야기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이다. “흥부전”에 나오는 흥부라는 인간은 사실 어린이들이 본받을 만한 인물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오늘의 사회에서는 적응할 수 없는 무능력자이다. 자기 가족을 부양할 만한 능력도 없고 어려운 살림에서 탈피해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 의욕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그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착한 마음씨뿐이다.

그런 마음이 있기에 그는 미물의 상처를 가엽게 생각하고 선행을 베푼다. 그리고 그 선행을 하늘이 가상히 여겨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줄거리 이다. 우리가정에서 어린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이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친절과 선행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유태의 이야기에서 강조하는 선행과는 기본적인 차이가 있다. 유태의 이야기에서는 공공적(公共的)성격의 선행이 강조되는데 반해서 우리의 경우는 개인적인 선행이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민족과 사회의 공동적인 이익을 위한 선행보다도 어떤 개인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점이 강조된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선행에 대한 하늘이 내리는 보상의 종류이다. 우리의 경우 대부분의 이야기는 많은 재물을 얻어 잘 살게 된다는 것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유태의 이야기에는 재물을 얻는 것보다도 지혜를 얻어 훌륭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이 많다. 교육적인 관점에서 보면 물질적인 보상보다 정신적인 보상을 강조하고 개인을 위한 선행이나 자선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선행이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 점 우리는 유태의 교육에서 본 받아야 할 점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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