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해방 직후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울 때 유년시절을 보냈고, 한국동란(6·25)마저 발발해 힘든 생활을 했던 기억이 난다.

물자가 귀해서 무엇이든 재활용하던 시절이었는데 당시 외국 과일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횡재에 가까운 일이었다.

어느 날 군장교로 복무 중이던 선친께서 밀감 몇 알을 갖고 오셔서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식구수로 나누다 보니 겨우 한두 조각 입에 넣을 수 있었는데 처음 맛보는 새콤달콤한 맛의 알갱이가 과일 향과 함께 입 안 가득 감돌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당시 부모님들의 대화를 통해서 이 밀감이 일본에서 왔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재배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지냈다.

그 후 내가 대학에 진학할 무렵 '대학나무'가 신문기사로 소개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제주 밀감나무였다.

당시는 높은 대학 진학열기로 인해 농촌에서 기르던 소를 팔아 자식 대학등록금에 충당하던 일을 상아탑에 빗대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풍자하던 시절이었는데, 제주도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밀감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가 자녀와 함께 성장한 밀감을 수확해 등록금을 댈 수 있었기에 제주밀감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불렀던 것이다.

등록금 마련에 힘들어 하던 우리 부모님들에게는 제주도 밀감나무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먼 외국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동안 제주밀감은 인기있는 과일이었다.

사과나 배, 감과 같은 과일에 식상해 있던 우리들에겐 이국적이면서 새로움 그대로였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사이좋게 손으로 껍질을 벗겨 조각조각 정겹게 나눠 먹는 즐거움과 낭만이 있는 과일이었다.

일찍 수확한 것은 약간 새콤하긴 했어도 달고 맛있었으며 흔치 않은 과일이었다.

그래서 알갱이뿐만 아니라 벗긴 껍질마저 버리지 않고 피부미용제로, 기름에 튀겨서 설탕 입힌 간식으로, 꿀이나 설탕에 절여 겨울철 감기예방용 즉석차로 이용하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들은 버릴 것 없는 제주밀감을 두루 애용했다.

어느 때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단맛이 줄어들고 이가 시릴 정도로 신맛이 강한 제주밀감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껍질은 색깔만으로는 육질의 숙성 정도를 분간하기 어려울뿐 아니라 딱딱하고 식용으로 재활용(?)하기도 불가능해졌으며, 먹을 수 있는 밀감알갱이보다 쓰레기로 버려야 하는 껍질이 지천으로 많아졌다.

제주밀감과 함께 팔리고 있던 단맛이 풍부한 서양 오렌지나 자몽을 소비자들이 선호하게 되면서 제주밀감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았다.

그동안 감귤농장주들이 초기에 식재했던 제주밀감을 베어내고, 병충해에도 강하면서 다수확이고 취급과 보관, 운송에 유리한 개량종으로 품종을 바꿨기 때문일까?

유감스럽게도 개량종은 초기품종에 비해 신맛이 너무 강해 소비자들의 거부감이 강했다.

그러나 재배농민들은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기보다 생산자 입장에 유리한 생산방식을 고수했다.

소비가 감소함에도 불구하고 생산량을 늘리다 보니 제주밀감농사에 적신호가 켜지게 됐다.

소비자의 기호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생산량만을 늘림으로써 수급조절에 실패한 제주밀감 재배농민들은 그 후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한때 수확기가 되어도 밀감을 수확하지 못하고 낙과한 채로 그냥 방치된 감귤농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애써 가꿔온 밀감나무를 베어내 생산량을 줄이거나, 예전 제주밀감나무를 다시 식재하기도 하고, 아예 다른 작목으로 바꾸기도 했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알 수 없지만 예전처럼 껍질도 먹을 수 있는 작고 단맛이 강한 품종이 다시 선보이기 시작한 것 같다.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우리에게 친근했던 제주밀감이 다시 우리 식탁에서 애용되기를 기원해 본다.


/김언현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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