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몸부림쳐도 미친 듯이 노력해도 이 가슴 속을 도려내는 것 같은 허무한 아픔에서 자신을 구할 수는 없다. 그리고 아무리 몸부림쳐도 죽는 것만은 자기 혼자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인간존재의 고독에서 구조 받을 수는 없다. 그리고 나는 그 “허무함”과 “고독”을 신(神)을 의지하지 않고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의 퇴로(退路)는 사랑 다만 그것뿐이다.

사랑 이외에 인간의 퇴로는 어디에도 없다. 미칠 듯이 타인을 사랑하고 미칠 듯이 인류에게 봉사하고 미칠 듯이 일을 한다. 자기가 죽어도 사랑하든 사람이, 사랑하든 사회가, 사랑하든 인류가 영원히 다음에서 다음으로 발전해 간다. 자기가 죽어도 지금 이렇게 자기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사회나 인류의 일부로 되어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 인간은 비로소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랑하는 기쁨과 그 사랑의 영원성을 믿을 수 있을 때 인간은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자연계(自然界)의 반복은 단순한 반복이다. 풀은 싹터서 생장하고 그리고 죽어간다. 봄이 되면 꽃이 핀다. 가을이 되면 시들어 떨어진다. 그리고 다음해의 봄에 피는 꽃은 또 작년과 같은 꽃이며 떨어져 가는 꽃도 또 작년과 같다. 자연계는 진보가 없는 영원의 되풀이이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은 다르다.

인류의 역사는 다른 것이다. 인류의 역사는 진보한다. 인류는 적어도 무언가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한 사람이 죽고, 다음 사람이 태어나고, 그 사람이 죽어간다. 그러나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자식에서 손자로 인류는 어딘가를 향해서 나가고 있다. 인간의 생과죽음은 식물의 생과 죽음의 반복과는 다르다. 그러한 이상 만일 이 인류의 영원한 흐름 속에 자기가 던져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면 우리는 “허무함”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어쨌든 사랑하는 것에 의해 자기가 살아간다고 믿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믿음에 의해서 자기가 개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존재의 허무함에서 탈각(脫却)할 수 있다. 철학자가 “유적존재(類的存在)”라고 할 때 문학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개인의 존재의 덧없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 중에 한사람이 있는한 두 사람이 함께 거기에 있는 것이다.” 자기가 죽음을 당했을 때 자기와 함께 죽으려고 하는 연인을 향해 “자, 우리 두 사람을 위해 너는 가는 거다.” “그리고 우리들 두 사람은 너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할 때 인간은 영원히 이어질 수가 있다.

연인이 아니라도 물론 좋다. 자기 자식을 혹은 자기 제자를 사랑하고 그리고 자기가 사랑하는 자가 자기의 사랑을 흡수하면서 자기 이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을 지켜볼 때 인간 존재의 유한성(有限性)에서 해방된다. 사랑할 것, 사랑을 할 것, 하여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마음으로부터 기뻐하고 사랑하는 이의 불행을 진심으로 슬퍼할 수 있을 때까지는 인간은 완전하게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죽어야 하는 것이고, 모르는 것이고,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든 존재가 영원과 절대를 한없이 동경하고 있다고 한다면 인간은 “사랑”이외에 의해 구제 받는 일은 결코 없다. 그리고 이 “사랑”에 의해서만이 인간은 “허무함”을 극복할 수가 있다. 인간이 영원을 동경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명예를 얻어도, 재산을 얻어도, 권력을 얻어도, 지위를 얻어도 결코 채워질 수가 없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죽어야 할 운명인 자기 개인을 위한 것인 이상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은 때때로 지나치는 “허무함”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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