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들잎은 푸르고, 꽃은 화사하고 붉고, 참새는 짹짹, 까마귀는 까악까악 우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들이 과연 어느 정도의 실체성(實体性)이 있을까····. 그것들은 확실히 되풀이 된 감각으로 하나의 조건반사(條件反射)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일체 모든 상념(想念)은 공(空)인 것이다.

지식과 경험을 쌓아 복잡한 기억의 심층(深層)에서 발효(醱酵)하는 자아라는 관념도 실체는 없는 것이며 가공(架空)의 관념이다. 그리고 후천적 기억층의 어둠을 타파(打破)하고 진공(眞空)을 구하여 정진하는 곳에 “불교”라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자아(自我)는 공(空)인 것이다.

비록 오늘날 인연이나 업력(業力)으로 인하여 천만 상(千萬像)이 차별지어 온갖 물상이 숨쉬는데 그 근원을 철저히 분석구명(分析究明)하고 보면 모두가 원래 공(空)이 된다. 그러고 보면 자아(自我)라는 나도 없고 너도 없는 것이며 생사(生死)도 없고 어리석은 자도 없는 것이며 진공평등(眞空平等)이 된다. 이 이치는 한때의 방편(方便)으로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 아니고 원래 법(法)의 실상(實相)이란 것이 아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인간세상의 희, 로, 애, 락 이라는 것도 똑바로 보면 봄의 들녘에 일렁이는 아지랑이 같고 풀잎에 반짝이는 아침 이슬 같은 것이며 꿈결 속에 노니는 것이나 무엇이 다르랴····. 그러므로 절대적인 바른 눈으로 철저히 보면 천지만상(天地萬像) 그대로가 본래 공(空)인 것이다.

이 공(空)의 이치를 깨닫고 보면 몸은 비록 생사(生死)의 가운데 있다 해도 생사를 초월하여 생사에 어두운 미아(迷兒)가 되지 않으며 열반의 고요한 경지에 든 것과 같은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오온개공(五蘊皆空)을 조견(照見)하는 것이다.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는 말은 일체의 고액을 제도한다는 것인데 고(苦)에는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라는 것이 있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말은 세상에서 많이 쓰는 말 가운데 하나이며 사고의 첫째가 애별리고(愛別離苦)라는 것인데,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괴로움을 말하는 것이다. 부모와의 이별, 애인과의 이별, 자식과의 이별, 형제간이나 친구들 등등의 이별의 괴로움이니 이보다 더한 괴로움과 슬픔이 어디 있으랴.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阿難尊者)같은 존자도 부처님 곁에 이십여 년을 시봉하다 부처님이 열반하시니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통탄하고 통곡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미 아라한(阿羅漢) 지위에까지 이른 아난이 보통사람과 같이 통곡을 하니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으랴 짐작이 가며 공자님도 서른두 살에 죽은 제자 안희(顔回)의 죽음에 “하늘이 나를 버리는 구나.”하며 땅을 치고 통곡하였다 한다. 인정이 있으면 반드시 와서 씨앗을 내리고(有情來下種), 인연 있는 땅에는 그 씨앗이 열매를 맺어 태어나네(因地果還 生)라는 오조(五祖) 홍인(弘忍)의 글귀가 있듯이 인연이 깊은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이별의 괴로움이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으며 이 이별의 장이 시로 소설로 연극 등으로 예술의 극치를 장식하고 있는 것도 동서고금이 같으며 회자정리(會者定離)라고 만나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정한 이치를 되뇌면서도 이별의 고통은 아픈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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