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자식을 낳으면 아이의 장래, 교육에 대해 나름대로 꿈에 부풀기 마련이다. 나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비록 세 딸들이지만 열 아들 안 부럽게 키우리라는 각오로 태교부터 신경 썼었다.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는 아이의 지적 발달은 물론 감성 교육을 위해 노력했다. 태어난 지 일주일 후부터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었고 말귀도 못 알아 듣는 아이 곁에 앉아 동화책도 읽어주고 틈만 나면 아이와 눈길 마주치는 일에 주력했었다. 이런 나를 보고 남편은 너무 극성스럽게 아이의 조기 교육을 시킨다고 나무라기 예사였다. 이는 무엇보다 훗날 아이들이 성장해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길 간절히 바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러기 위해선 가정교육이 선행 되어야 함을 느꼈다.

가정교육의 으뜸으론 뭐니 뭐니 해도 부모에 대한 효 실천이 우선임을 깨달았다. 효는 백행의 근본이잖는가.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사람은 매사가 지혜로워 사람답다. 어렸을 때 어머닌 당신의 흰 고무신을 매일 눈부시도록 희게 닦아놓으라고 우리들에게 타일렀었다. 어머니의 흰 고무신을 백설처럼 희게 닦는 일이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지난날 바람 잦은 아버지로 인해 어머닌 날만 새면 어린 자식들 입의 풀칠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었다. 그런 어머니의 고달픈 삶을 함께한 어머니의 흰 고무신은 늘 제빛을 잃곤 했었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고무신은 뭉친 지푸라기 수세미에 비누칠을 한껏 하여 힘껏 닦아야 비로소 제 빛을 찾곤 했었다. 하지만 그 일도 우리들 어린 힘엔 때론 부쳤었다. 추운 겨울 날 마을 앞 냇가에 나가 얼음장을 깨고 맨손으로 고무신을 닦을 땐 추위에 손이 곱아 '호호' 불곤 했었다. 그러나 우린 단 한마디 불평 없이 어머니 고무신을 하얗게 닦아 섬돌 위에 올려놓곤 했었다. 또한 어머닌 잠자리에 들 때마다 우리들에게 당신의 침구를 깔아놓는 일과 아침마다 요강을 비우는 일을 시켰었다. 어머니께서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도와 갈퀴질을 했었고 삭정이를 주워 오기도 했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때 어머니께서 우리들에게 집안일을 몸에 배이게 한 것은 어머니의 의도적인 교육이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탓에 이즈막도 나를 비롯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를 위하는 일이라면 언제나 몸을 사리지 않고 있다. 이런 어머니의 지난날 우리들에게 행하였던 가정교육을 나또한 딸아이들에게 대물림 하였다. 세 딸들이 말귀를 알아들을 즈음부터 나의 등을 두드려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연년생인 두 딸이 유치원에 입학 한 후엔 남편의 구두를 닦는 일, 자신의 방 치우는 일을 하면 용돈을 주기로 정하기도 했었다. 초등학교 입학해서는 잠자리에 들기 전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 이부자리를 깔아놓으라는 심부름도 시켰다. 그 덕분인지 딸아이들은 감성지수도 높고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슬기롭게 대처하고 그것을 견디고 이겨내는 끈기 또한 강하다.

며칠 전 일이다. 막내딸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 초라한 행색의 세 식구가 손님으로 왔단다. 세 식구가 치킨 한 마리를 달랑 시켜 놓고 음료수 한 병 청하지 못한 채 치킨만 아이에게 먹이더란다. 세 식구 중 두 사람은 부부이고 한 명은 열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 아이인데 얼굴색이 몹시 창백한 것으로 보아 병색이 완연해 보이더란다. 치킨 한 마리를 시킨 부부는 그것을 전혀 입에 대지 않고 자식이 맛있게 먹는 모습 만 대견한 듯 말없이 바라보고 있더란다. 그것을 본 딸아이는 그들의 누추한 행색으로 미뤄보아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으로 알고 그들이 주문하지도 않은 음료수를 세 병 그들 앞에 놓았다고 했다. 그들에겐 사장님의 서비스라고 말했지만 음료수 값은 나중에 딸아이가 치렀다고 하였다. 왜 그런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이에 딸의 속 깊은 말을 들었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가까스로 치킨만 시키고 자식에게 음료수 한 병 마음 놓고 사주지 못하는 그들이 딱해서라고 하였다. 그런 딸아이를 지켜보며 훗날 사회인으로서의 완벽한 스펙은 아직 미처 갖추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인간적인 따뜻한 가슴을 갖춘 듯하여 딸아이가 참으로 대견스러웠다.



/김혜식 하정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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