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을 여러 번 다녀왔다.세계에서 최초로 12년 전에 몽골과 문학교류 협약서를 우리나라 대표로 맺어 지금까지 여러 차례 상호간 왕래를 해오다 보니 몽골 친구들이 많다.현 몽골 대통령이 총리 시절, 총리공관으로 초대해 바로 옆 자리에 앉아 만찬을 2시간 동안 함께 했다. 나이프 7개, 포크 7개가 준비된 거대한 만찬이었다. 아직도 자랑스러운 것은 그 당시 흥덕고 국어교사이며 지역 문학회인 내륙문학회 회장이 한·몽 문학교류 협정서를 세계 최초로 맺은 것이다. 몽골 일간 신문과 방송에 모두 나왔다. 다음날 신문을 확인했는데 모든 신문에 기사를 크게 난 것은 맞는데, 통역의 실수로 문제를 발생했다.

인터뷰 때 한국 문인에 수입에 대하여 물어 "마음을 가리키는 동인 활동을 함께 하는 도종환 시인은 백만 권의 시집을 팔아 한 2억 원의 돈을 벌었다. 그렇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다"고 답했는데 이 말을 통역이 잘못 번역해 '벌었다'를 '버렸다'로 번역해서 신문에 나왔다. 이외 그냥 웃어 넘어가기엔 쉽지 않은 일이 몇 건 발생했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서동스'라고 부릅다. 풀어보면 '무지개의 나라'다.우리의 서두름 조급함을 야간 게으른 그들은 근면함으로 아주 긍정적으로 우리를 보고 있다.

처음 몽골에가 한국문인들의 오기에 다 뻗었다. 야외에서 초저녁에 40여도의 보드카 술을 많이 가져다 놓고 보름달이 뜬 밤하늘을 보며 우리나라 입장으로 생각해-보름달은 보통 밤 12시전에 기울어진다. 저 달이 기울 때까지 술을 마시기로 달이 이기나 우리가 이기나 내기를 하면서 마셨는데 새벽까지 보름달이 기울지 않아 모두 뻗었다.

장날이라 장 구경을 울란바토르-붉은 영웅의 뜻(몽골 수도)에서 갔는데, 정말 예쁜 아가씨가 얼마간 옆에 따라오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세계 최고의 한국군 장교 출신으로 감지했다. 오랜 시간 계획적으로 따라오다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아주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없이 있었다.

손에는 신문 한 장이 들려있었다. 언제쯤 다가올까 속으로는 생각하며 다른 곳을 보는 척했다. 기분이 이상해 돌아 서는데 내 웃옷 주머니 밑이 쫙 찢겨 있었다. 몽골에서의 나의 첫사랑은 그렇게 예쁜 소녀 소매치기 소녀였다. 아직도 그 눈빛이 생생하다. 지금도 해외여행 시 그 옷을 겉에 걸치고 나간다.

울란바토르 크기는 청주만하다. 인구 면에서만. 무심천처럼 시 옆으로 툴라강 우안이 흐른다.시대로 보면 우리의 60년도와 같다. 장날 고무신을 때우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 이제는 조금 더 발전했다. 중등교사 월급이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십이만 원 정도다. 1996년 7월에는 몽골의 독립기념일을 맞아 나트사그도르지의 거리 1km 정도를 서울의 거리로 지정 명명하였다. 울란바토르에 노래방은 거의 우리나라 사람이 개척하여 운영하고 있다. 들어가 보니 우리의 노래방에 더하기 룸살롱이다.

몽골에 갈 때 여성분들은 긴 치마를 꼭 준비해 가길 부탁드린다. 장거리 여행 중 다녀보면 대부분 화장실이 없다. 버스가 쉬면 남자 좌측으로 여자 우측으로 이동하여 허허 벌판에서 용변을 본다. 꼭 서부 영화에서 나오는 아파치의 원형 대형을 갖춘다. 그 속에서 여자들은 한 사람씩 용변을 본다. 그러니 길고 넓은 치마가 좋다. 시내에서는 별상관이 없다.

여행이 바뀌고 있다. 지나가는 관광여행에서 머무르는 체험 여행으로. 앞으로 여행은 완전한 체험여행이며 머무는 여행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냥 스쳐지나가는 여행은 별 가치가 없다. 희망을 갖고 사시는 모든 분들은 돈을 모아 무조건 떠나길 바란다. 우리나라로 어디나 해외로 어디로 든.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사람 사귀는데 투자하기 바란다. 능력은 지식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 개선이다. 사람을 아는 것이 능력이고 힘이다.

몽골의 눈빛 선한 그 친구들이 요사이 자주 생각이 난다. 정도 많고 수줍은도 많지만 말하기 좋아하고 노래하기 좋아하고 시낭송 좋아 하는 신명이 많은 몽골 친구들이 근래 더 보고 싶어진다.



/성낙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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