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편> 홍주성 전투 패배는 전략상 후퇴로 추정

충청 지역이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홍성지방에서도 동학혁명 초기부터 동학교도들이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기록에, &amp;amp;amp;amp;ldquo;7월로 접어들면서 동학군이 재봉기하여 읍내는 물론 인근 지역이 동학 주문외는 소리로 넘쳐 났을 뿐 아니라 이교(吏校)와 노령(奴令)들도 동학에 가입했다&amp;amp;amp;amp;rdquo;고 하여 이 지역동학 교세를 짐작할 만하다.

충청감사 조병호도 관군을 소요 지역에 급히 파견하려 했지만 감영군 충원이 뜻대로 되지 않아 방치하고 있었다.

▲홍주성 전투도. 왼쪽에 보이는 것이 홍주성 조양문이다.
이렇게 되자 &amp;amp;amp;amp;ldquo;홍주목사 이승우는 7월 13일부터 관내의 치안질서를 복구하고 동학군을 해산할 계획으로 홍주 및 인근 지역의 동학접주들을 불러들여 해산을 설득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8월19일까지도 성 안에는 동학군들로 가득 차서, 접주들은 말을 타고 거리낌 없이 다녔다&amp;amp;amp;amp;rdquo;고 하여 7&amp;amp;amp;amp;middot;8월의 홍주는 성 안의 지배층과 성 밖의 동학교도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홍성 지역의 지도자로는 김영필 김두열 한규하 등이었다.

성 안팎 총소리 천지를 진동하고

10월 27일, 박인호 대접주가 이끄는 동학군은 신례원 관작 전투와 덕산에서 연거푸 승리한 뒤 홍주성을 향해 진군했다. 당시 홍주성은 동학혁명군이나 관군 쪽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동학혁명군 쪽에서 보면 공주성을 방어하려고 내려오던 관 일본군 전력을 홍주로 분산시킬 수 있었고, 홍주를 차지하면 장차 남북접 연합군이 서울을 향해 올라갈 교두보를 확보하는 중요한 전투였다. 손병희가 이끄는 경기 충청 북접군과 전봉준이 이끄는 호남의 남접군이 논산에서 합진하여 대연합군을 형성하여 공주성을 압박해오는 숨 가쁜 상황이었다.

관 일본군은 지난 21일 목천 세성산에서 격파한 동학혁명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패배한 동학혁명군은 내포 지문 동학혁명군에 합류했다. 한편 일본 토벌대는 내포의 동학혁명군이 공주성으로 향하는 발목을 잡는 일이 시급했고, 홍주성을 지키기에 여의치 않으면 장기전에 돌입할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박인호 대접주는 예산 관작전투로 관군의 전력이 큰 타격을 입어 홍주성의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고 보고 곧장 홍주성 공격을 시도 했다. 10월 28일, 동학혁명군은 홍주 성문 밖 향교촌 뒤편에 진을 치고 적군에게 노획한 신무기로 총공격을 개시했으나 관 보부상대 일본군 등 연합 세력이 완강하게 항전함으로써 피아 간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이렇게 성 안팎에서 서로가 퍼붓는 총 포탄 터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렇게 치열하게 공방전이 계속되는 동안 동학혁명군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자 점차 사기가 떨어져가고 있었다. 동학혁명군 측에서는 전략상 후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일본 기록에 의하면 &amp;amp;amp;amp;ldquo;&amp;amp;amp;amp;hellip;10월28일 오후 4시 동학농민군은 덕산 가도 좌측의 고지를 점령하고 4시 25분에는 그 한 부대가 빙고치(현 홍성읍)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400m 밭두둑에 이르렀을 때 빙고치 위의 일본군이 몇 차례의 집중사격을 가하자 적 수명이 쓰러졌다. 적군은 주춤하다가 다시 전진해왔다.

빙고치의 일본군은 중과부적으로 서문 좌측으로 후퇴하여 접근해 오는 적을 향해 사격했다. 북문의 일본군은 덕산 가도 서쪽에서 접근해오는 고지의 적을 3회에 걸쳐 집중 사격을 가했다. 적이 놀라 2대로 나누어 도로 동쪽 숲 속으로 들어갔는데, 이 때 북문의 홍주 관군이 대포를 쏘고 아울러 동북쪽에서 집중 사격을 가하니 적군의 공격 주춤 해졌다.

그런데 적군의 한 부대가 동문 전방 600m 쯤 떨어진 숲속에서 전진해오며 방화하니 불길이 치솟고 성 밖 100m까지 접근하며 총공격을 가해왔다. 그리하여 온 병력을 동문으로 집결하여 이에 응전했다. 밤이 되자 적군은 더욱 맹렬하게 성 밖 40m까지 대포를 끌고 와서 동문에 난사하며 격전이 계속되다가 7시 30분 쯤 포성이 멎었다.&amp;amp;amp;amp;rdquo;

동학혁명군으로서는 병력의 수로 보나 전투 경험까지 갖추고 있었으나 신무기를 갖추고 체계적으로 훈련된 일본군에 패하고 만 것이다. 실제로, 동학혁명사에서 일본군에 저항한 싸움은 대부분 패했다.

홍주 의사총은 `동학혁명군塚`

홍주성 전투에서 동학혁명군 측의 사상자도 많이 발생하여 동문 밖과 숲 속에 시체가 쌓였다고 한다.

여기에 홍주성 전투에서 생포된 동학혁명군 수 백 명이 북문인 망화문(望華門)에서 처형되었는데, 이 시신들을 어디다 치웠을까. 일본 측 기록에 &amp;amp;amp;amp;ldquo;홍주성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은 약 3만 내지 5만 명이었으며, 전사자는 200여 명이었다&amp;amp;amp;amp;rdquo;고 하여 비교적 상세하다. 몇몇 학자들은 당시에 기록된 전투 상황으로 보아 현재 홍주 천변에 있는 `의사총`은 당시에 희생된 동학혁명군총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관 일본군은 동학혁명군의 가족까지 색출하여 참살하던 때라 감히 시신을 찾아 장사지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방치 되었고, 1906년 의병 전투 희생자의 경우는 시신을 찾아가게 한 점이 이를 뒷받침 한다. 후손들은 실증적인 사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진실을 바르게 규명해야 한다.

홍주성에서 물러난 내포의 동학혁명군이 궤멸되어 물러난 것이 아니다. 현대식 훈련을 받은 일본군의 신무기 앞에 패배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지만, 동학혁명군은 여전히 천혜의 요지인 해미 성을 지킬만한 여력이 있었던 듯하다.

해미 동쪽 가야산 일락치로부터 기습해온 관 일본군과 하루 동안 접전 끝에 패하기는 했지만 당시 빼앗긴 무기류를 보면 충분한 전투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군에게 노획한 무기류는 &amp;amp;amp;amp;lsquo;불랑기(佛狼機) 11대, 대포 4문, 자포총(子砲銃) 22정, 천보총(千步銃) 10정, 조총(鳥銃) 43정, 창 85자루, 칼 9개, 대정(大鉦) 3개, 소쟁(小錚) 3개, 북(大鼓) 2개, 포환(砲丸) 130발, 장전(長箭) 4개, 연환(鉛丸) 6살자, 함초화약(陷硝火藥) 500근, 침수기(侵水器) 8개, 수연통(水煙桶) 4개, 말(馬) 8필, 당나귀(驪) 5필, 소 52마리&amp;amp;amp;amp;rsquo;등으로, 여전히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지도자들은 전투 장비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후퇴한 것을 두고 땅을 쳤을 뿐이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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