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10년 안에 10억 만들기, 부동산 ? 주식투자 고수되기 라는 신드롬으로 우리 사회는 들썩였다. 국민에게 이 모든 것들은 나도 할 수 있다는 동기도 부여하고 더 잘 살아보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지금, 그 목표들은 시들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힐링이 필요하다고 야단법석이다. 참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한 때는 나라를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도 소리 없이 이겨낸 우리가 아닌가? 최근 우리나라의 교역규모는 전 세계 12위이며 국가경쟁력은 전 세계 19위에 이른다고 한다.

서구의 산업 국가들이 이백 여년에 걸쳐 이루어낸 것을 우리는 몇 십 년 만에 이루어 냈다. 그 힘든 과정에서도 우리 국민은 아프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봐도 행복하다는 사람은 드물다. 행복은커녕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어야 할 지경이다.

많은 중고생은 적성과 상관없이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학교와 학원을 오가고, 대학생들은 취업준비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경이다. 힘들게 직장을 들어가도 가정을 꾸릴 작은 아파트, 전세 하나 얻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40, 50대들은 자식들 키우느라 노후대책은 생각할 수도 없다. 60, 70대들은 이전 세대와 달리 몸은 건강하지만 일할 수도 없고 주위에 사람도 없다. OECD 통계에 의하면 60세 이상 빈곤 율은 한국이 1위이며, 서울경찰청자료로는 혼자 사는 60, 70대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자살률 또한 높다고 한다. 잘 살려고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다 모른 척했는데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을까?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잘살기 위해 한쪽으로 치워두었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은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학교공부로도 부족해 학원까지 다녀온 자녀는 문을 닫고 자기들 방에 들어가 있다. 부모를 졸라서 산 신형 스마트폰으로 카카오톡 대화는 나눌 줄 알지만, 아빠의 구두가 얼마나 낡았는지, 엄마의 블라우스가 10년은 넘은 구식인지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뭐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공부만 하라고 하지 않았는가. 가족들 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알아주지 않는 아내들에게 화낼 수도 없다. 아내가 샘플을 모아 주름진 얼굴에 바를 때 화장품 하나 사 줄 돈은 없어도, 내가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가부장적인 사고 때문인지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살지 않았는가.

남편은 술 마시고 자정이 다 되어서 들어오고 어쩌다 쉬는 날이면 텔레비전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 아내는 자식과 남편이 있음에도 외롭고 서럽지만 화를 낼 수 없다. 오늘은 남편이 직장상사에게 어떤 소리를 들었는지, 직원들 월급을 주려고 가슴 조이며 술이 아니면 버틸 수 없는 상황들은 알지도 못했으니까. "당신이 최고야"란 말 대신 돈 많이 벌어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정치인들은 정당의 이익과 사리사욕이 우선인 것 같고, 서민과 중산층의 이익이 정책에 반영되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욕할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을 우리 대표라고 투표했고 때로는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자랑인 냥 기본 권리인 투표참여도 하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지금 아프고, 속상하고 행복하지 않다. 열심히 살았는데, 그러니 더 힘들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를 힐링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딸아이가 길에서 본 어느 노부부 얘기를 해주었다. 하얀 백발의 할머니는 핑크색 원피스와 머리띠를 하고 할아버지는 베이지색 멜빵 반바지에 베레모를 멋지게 쓰고 계셨는데, 둘이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다고 했다. 아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우스꽝스럽고 재미있어 보였는가 보다.

난 그분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 나의 행복과 기쁨을 결코 남을 의식하며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물질적 가치로 측정될 수 없다는 이유로 그것을 함부로 다른 것과 바꾸지 말자. 평생을 자식 뒷바라지하며 잘 살기 위해, 사회적 눈을 의식하고 살아왔을 그 노부부는 늦게나마 개성 넘치는 멋진 자신들로 힐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풍요의 빈곤에 모두가 아파하고 있다. 가까이 있는 내 가정부터 어루만지며 이웃을 섬기는 사회가 될 때 삶의 질이 향상되지 않을까.

나는 가지고 있던 휴대전화기를 들고 단축번호 1번을 힘껏 눌렀다. "여보! 오늘 우리 된장찌개 끓여서 삼겹살 구워먹을까?" "설거지는 내가 해줄게."



/정관영(공학박사, 충청대학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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