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믿는 사람들이 출세를 하여 자기 이름 석 자를 남기려고 욕심을 부리고 덤빈다. 자장이 어떻게 하면 통달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공자가 그대가 말하는 통달이란 것이 무어냐고 되물었다. 자장이 나라에서도 이름이 나고 집안에서도 이름이 나는 것이라고 말하자. 공자는 그것은 명성이지 통달은 아니라고 밝혀준다.

무릇 통달한 사람, 즉 달인은 어떠한 사람인가? 마음과 행동이 순박하고 마음과 행동이 곧으며 그리고 옳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곧 달인인 것이다. 남의 말을 유심히 귀담아 들어주고 남의 마음을 헤아려서 몸가짐에 신중을 기할 줄을 알면 나라에서나 집안에서나 걸림 없이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고 한다. 본래 달인의 달(達)이란 걸림 없는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말하자면 자기를 닦아(修己) 남을 편안히 하는데 아무런 걸림이 없고 자기를 이겨(克己) 사람과 사람을 믿게 하고 도와 서로 합치게 하는 것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행하는 자유를 누린다는 것을 뜻한다. 노장의 자유는 사람이 일을 떠나야 누리는 자유지만 공맹의 자유는 사람의 일을 인의(仁義)로 이끌게 함으로써 성취되는 자유이다. 이러한 인의에 의해 성취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 곧 통달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명성이란 하나의 초개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명성을 좇는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다. 겉으로는 욕망을 숨기고 속으로는 불길처럼 태운다. 이 얼마나 거짓이고 위선인가. 그러나 명성에 걸신이 들리면 그러한 위선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불을 좇는 불나비처럼 명성을 향해 치닫는다. 대개 이러한 인간들이 나라에서나 집안에서나 겉으로만 이름을 낸다고 비판을 받게 된다. 대중(大衆)의 눈에 뜨이고 만 사람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화려한 빛깔을 자랑하는 버섯과 같고 아니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기가 십상이다. 본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옛날부터 빛 좋은 버섯은 먹지 말라. 먹으면 독을 타서 죽고야 만다고 했다. 명성이란 겉으로 보면 화려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더럽고 구역질나는 것들로 범벅이 되어 있는 꼴이다. 인기를 생명으로 알고 불나비처럼 인기를 좇다가 결국 왜 마약을 마셔야 하는가? 본래 명성이란 불길 같아 걸려든 것이면 누구이든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린다. 명사는 이름을 남기려고 거짓으로 연극을 하고, 통달한 사람은 수수한 버섯처럼 그저 음지에서 사람들이 먹으면 살로 갈 양분을 갈무리하고 있을 뿐이다. 통달한 사람을 군자라 불러도 되고 지인(智人)이나 현자(賢者)라고 불러도 된다.

어느 때, 어느 세상이든 명사는 많으나 현자는 아주 드문 편이다. 사람은 저마다 명성을 탐하고 높은 자리를 넘보려고 한다. 그래서 서로를 못 믿고 서로를 헤집고 시기하며 미워한다. 이러한 마음의 씀씀이가 경쟁의 심리이며 성취의 욕구이지만 그 끝은 쓴 잔을 마시게 하며 심하면 독배를 마시게 한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을 보라. 청운의 꿈을 안겨준다는 과거시험에 합격해 임금의 수하에 들어가 이름 석 자를 남기려다 얼마나 많은 군상들이 사약을 받아 마시고 절명해야 했던가! 그들은 모두 따지고 보면 불을 좇다가 불꽃에 온 몸을 태워버린 꼴이 아니었던가. 물론 조선조에만 이러한 인간형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름 밤 불꽃이 있으면 불나비나 하루살이가 날아드는 것처럼 인간의 세상은 온갖 불꽃들이 다 타는 현장인 것이다.

명사는 오만하고 달인은 겸허하다. 오만은 열기와 같아서 위로 올라가려고만 하고 겸손은 물과 같아 낮은 데를 향해 흐른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명사들은 언제나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올라가다가 추락하기 일쑤인 것이다. 연말 대선을 앞두고 많은 명사들이 불나비처럼 불을 향해 달려들고 있다. 불꽃 축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다를 바가 없다고 공자께서 잘라 말해주었다. 가뭄에 계속되어 물이 말라 목숨이 해롭게 되는 것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물이 넘쳐 목숨이 해롭게 되는 것이나 그 결과를 보면 매양 같다. 사람들이 마음 씀씀이를 가뭄처럼 한다거나 장마처럼 하게 되면 그 탈은 결국 다를 바가 없다.

알맞음을 아는 마음은 몸 둘바를 알아서 발을 뻗을 줄도 알고 오므릴 줄도 안다. 공자의 제자들인 자장(子張)은 어디서나 발을 뻗자고 떼를 썼던 모양이고 자하(子夏)는 발을 오므리고 꽁무니를 뺏던 모양이다. 언제나 자장이나 자하 같은 무리들 탓으로 세상은 살벌해지기도 하고 구렁이 담 넘듯이 감추고 숨기면서 넘어가 사람들의 속을 상하게 한다. 사람들의 속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더한 부덕(不德)은 없는 법이다. 지나친 것과 모자란 것은 다 같다. 지나친 것도 병(病)이요 모자람도 병이다. 중용(中庸)이야 말로 우리와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