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혼란스러울 땐 충신이 그립고, 집안이 어려울 땐 어른이 그리운 법. 바야흐로 연말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이 요동치고 혼란스럽다. 뚜렷한 정치철학이나 이념, 국민은 안중에도 없이 어느 쪽에 줄을 대야 할지 당겨보고 튼실한 줄이다 싶으면 또다시 철새처럼 몰려다니는 모습이 예나 지금이나 선거철의 풍경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하기야 워낙 오랫동안 지조없이 오락가락 국민을 기만하는 철새정치인들 때문에 식상한 것도 사실이지만, 정체감을 상실한 간신배 정치무리들을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다. 지나온 역사를 거슬러 봐도 윗분을 지근에서 모시는 신하 중에 간신이 득세하여 제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면 망함을 재촉하였고, 윗분의 그릇된 행동과 판단에 직언하고 목숨을 건 충신이 많으면 흥했던 교훈을 기억하고 있다.

간신이란 원래 대의의 차원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사익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자신의 영달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데 그것은 곧 돈과 권력, 무엇보다도 자신의 안위가 최고의 관심사로 소인배 그 자체이다. 이들에게 민초들의 애환을 달래줄 아량은 애초부터 기대하기 어렵다. 반대로 충신들은 대의를 생각하고 자신의 안위보다 타인과 조직의 안위를 더 중시하며 자신의 이익보다 전체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자신을 초개처럼 버린다.

사실 복잡다변의 현대를 살면서 굽히지 않고 용기있게 충신으로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충신들이 지닌 소신과 철학이란 조직문화나 윗분들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경우가 허다하고, 반목하는 사람들과도 영합하지 못해 배치되기 쉽다. 따지고 보면 어느 시대의 역사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충신들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만큼 충신으로 산다는 게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고 고뇌하고 고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다수는 양자선택의 고통보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때로는 우유부단한 변절의 쉬운 길을 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보면, 집념과 용기가 강할수록 고통스런 삶이지만 큰 그릇이 된 경우는 많다. 조선 중종 때, 간신배들의 모략으로 지방에 유배된 동생의 억울함을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잘못된 처사임을 임금에게 직언하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때 무고임을 확신한 한 선비가 "천륜이란 지극히 중한 것인데 분명치 못한 일로써 형제가 상보하지 못하는 것은 천심을 배반하는 것이다"라고 목숨을 건 직언으로 사실관계가 명백히 가려지고 충신으로 추앙받았다고 한다. 이것은 곧 충신의 직언이 귀에 거슬려도 화를 참고 포용하며 기쁘게 들어주는 윗분의 진정한 모습이다.

우리는 흔히 왕조나 국가가 멸망할 때는 예외 없이 간신배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어느 때를 막론하고 간신배는 존재했고, 다만 그 사회나 조직이 간신의 권력을 적절히 통제하고 제어할 건강성을 상실했을 경우에 위기를 맞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도 군주시대의 간신을 연상케 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작은 단체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윗분이 있는 곳이면 반드시 간신배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밑천 안 드는 기술 중 최고가 아부이기 때문이다.

어떤 지도자나 보스도 '아니오'라고 대답하며 소신을 굽히지 않는 부하는 부담스럽다고 한다. 한비자의 「세난편」에 '보스가 개인적 사심에 기대어 이권을 취할 때는 공명정대한 일이라 부추기고, 보스가 과감하게 추진할라치면 앞장 서 칭송하고, 보스가 잘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잘못을 꼬집어 곤란하게 하지 않는 간신이 편하게 여겨질 수 있다'라고 적혀있다. 결국 듣기 좋은 말로 현혹하고 눈과 귀를 가려주는 간신은 어찌보면 필요악인지도 모르겠다.

건강한 조직, 건강한 사회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필요악으로 존재하는 간신들은 충신들이 주는 스트레스를 완충해 주는 역할에 그쳐야 한다. 알아서 기는 간신배와 모리배가 깊숙이 관여하고 득세하여 전권을 휘두르면 그 조직과 사회의 장래는 암울해 진다. 갖가지 사회적 병폐로 양극화가 심화되는 즈음에, 더욱이 총선을 목전에 두고 사회구성원 간 갈등과 분열이 광풍처럼 휘몰아칠 혼돈의 시기에 '아니오'라고 소신 있게 외치는 충신들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무능과 무소신, 부패와 비리로 얼룩진 윗분 주변의 간신들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다.



/김종탁(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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