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사람마다 칠공자가 누구 누구인지 아느냐고 물었던 때가 있었다. 모모 재벌의 아들이네, 모모 부호의 아들이네, 아니면 모모 고관의 아들이네 하면서 그럴듯한 입질거리를 칠공자가 제공해 주었다. 딱 꼬집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돈이 많은 집의 아들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들은 돈 걱정이 없었으므로 돈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짓들을 하면서 현대판 한량 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엄청난 판돈을 걸고 포커판을 벌려 돈으로 놀이를 하고 엄청난 화대를 미끼로 밤마다 미녀를 후려다 엽색놀이를 한다는 칠공자들은 할 일이 없어 심심해 그런 짓을 저질러 보는 것이다.

돈 밖에 없는 칠공자들은 따지고 보면 불쌍한 치들이다. 세상의 물정을 모르고 사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고 하는 행동들인 까닭에 그들이 하는 짓들이 틀려먹었다는 판단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말하자면 멀쩡한 바보들이 심심해서 놀음도 하고 계집질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네들의 입에는 항상 무슨 재미난 일 좀 없느냐고 묻는 푸념들이 고약한 냄새처럼 붙어 다녔을게다.

놀음을 업으로 삼는 놈은 돈을 따야 살아남지만 돈이 많아서 따도 그만 잃어도 그만인 칠공자들은 시간을 보내려고 그런 짓을 할 뿐이고 돈으로 여자를 사다가 알몸을 탐닉하는 짓거리 역시 심심해서 그렇게 할 뿐이라고 동정할 수도 있는 일이다. 사람이 미친개가 되고 싶으면 미쳐야 하는 것이고 망나니가 되고 싶다면 제 부모의 품에 칼을 꽂게되는 것이 아닌가. 날마다 질펀하게 돈으로 목욕을 한다는 칠공자류의 인간에게 무슨 고뇌가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은 없다. 다만 불만과 불평, 그리고 나태만 있어서 항상 주린 짐승처럼 킁킁거릴 뿐이다. 모습만 사람이지 몸만 살아서 비등대는 인간이란 마음이 불모지가 되어 풀 한포기 자랄 수 없게 되어 황량하다. 말하자면 폐인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칠공자는 퇴폐의 한 본보기로 서울 장안의 모든 입들이 흉을 보았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는 우스개소리가 있다. 모르면 엇나가는 짓을 범하고도 그 사실을 모른다는 말이다. 제가 하는 짓이 부끄러운 것인지를 아는 사람은, 사람을 생각하고 삶을 생각하는 사람이다.

사는 일이 왜 고통이라고 하는가? 독일시인 키에르케고르는 왜 인생이 고해라고 하였는가? 뜻 같게 되지 않지만 삶을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러한 까닭을 헤아리자면 사람은 널리 배워야하고 제자리를 알아야 앉을 줄도 알고 설 줄도 알게 된다. 분수를 알아서 제자리를 아는 것이 예(禮)일 것이며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아는 것이 곧 문(文)일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문(文)에 멀고 예(禮)에 멀면 엇나가는 짓을 한다. 왜 칠공자는 망나니가 되었을까?

문(文)이나 예(禮)를 떠나서 그런 망신을 한 셈이다. 글로써 널리 배우고 예로써 몸단속을 하면 엇나가는 일이란 좀처럼 없을 것이다. 글(文)을 가까이 하면 눈(目)이 밝아지고 예(禮)를 가까이 하면 심성(心性)이 깊어지는 법이다. 눈을 감고 걷는 것과 눈을 뜨고 걷는 것이 다르고 밤길을 걷는 것과 낮길을 걷는 것이 다르다. 얕은 물은 소리를 내고 흐르지만 깊은 물은 소리를 내지 않고 흐른다. 글을 가까이하여 눈이 밝아지고 지혜로워지고 예(禮)를 가까이 하여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는다면 어찌 독(毒)이 있다 할 수 있으며 구린내가 난다 할 수 있겠는가. 나를 잘 다스려 남의 입질에 오르내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잘 사는 것이요 국가에 이바지 하는 길이 아니겠는가! 적어도 칠공자처럼은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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