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사람을 두루 아는 것보다 속을 다 털어 보일 수 있는 한 사람을 아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다. 그 한 사람이란 누구인가? 그는 곳 벗이다.

벗이란 마음이 서로 통해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되는 경우를 말한다. 달면 오고 쓰면 가는 것은 이득을 따져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다. 이런 교유는 겉으로만 친하고 속으로는 경쟁하거나 시샘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일하는 곳이 같아서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공통의 일을 위해 서로 만나는 경우이다. 이러한 만남은 동료의 선을 넘지 못한다.

벗은 허물이 없다. 벗은 상대를 사랑하므로 무엇이든 잘되기를 바란다. 만일 벗이 어떤 결함이나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으면 서슴없이 솔직하게 충고해 준다. 벗이 아니면 충고를 해주기가 어렵다. 다들 저 잘났다는 생각으로 사는 세상에 충고를 하려고 들면 고깝게 듣기 일쑤이다. 좋은 말을 하고도 감정을 사는 경우를 얼마든지 볼 수가 있다. 남의 일에 관심을 쓸 것이 뭐있느냐고 하면서 자기나 잘하라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벗끼리는 쓴 말을 달게 받고 고마워한다. 서로의 믿음에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함부로 다루어선 안 된다. 서로 믿음을 소중히 갈무리하면서 북돋아 주어야 벗은 난초의 향기처럼 고고하면서도 은근해지는 것이다.

현대는 벗이 없는 세상이라고 다들 말한다. 이로우면 서로 벗이 되고 손해가 되면 서로 원수가 된다고들 한다. 이익 때문에 벗이 되는 경우는 없다. 서로 마음이 통해야 벗이 된다. 현대인은 고독한 성주(城主)가 되어 성문을 걸어 잠그고 서로의 내통을 거부하는 단독자처럼 살아간다. 그처럼 누구나 벗을 소망하면서도 벗을 사귀지 못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그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잃어버린 탓일 것이다.

빨치산으로 고생을 하던 지리산 자락 산중고을 파출소에 독한 소장이 부임한 일이 있었다. 초등학교 사오학년을 중심으로 해서 염탐꾼 노릇을 시켜 부모가 빨치산 놈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알려 달라고 부탁한 다음 말을 잘 들으면 상도 주고 반장도 시켜 준다고 꼬셨다. 그렇게 세뇌를 시킨 뒤로 아이들이 살짝 살짝 와서 고자질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붙들려가 혼쭐이 나고 돌아와 몸이 병들어 한해 농사를 못 지을 형편이 된 경우가 많았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러한 얄밉고 잔인한 짓을 눈치 챘던 한 선생이 아이들에게 정직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살인을 하고 돌아와 집에 숨어 있어도 고발을 하지 않는다. 부정직해서가 아니라 어머니는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직한 것보다 더 소중하다. 그런데 어떤 어머니가 못된 죄를 범했다고 자신의 몸에서 나온 아들을 고발하고 후한 상금을 탓다고 하자. 그러면 세상인심이 그 어머니를 강직하다고 칭찬을 하지 않고 매정하고 상금 밖에 모르는 여자라고 욕을 하게 된다. 이처럼 사랑보다 정직을 앞세운 강직이란 천하에 못된 짓이다. 만일 반대로 아버지나 어머니의 행동을 살펴 두었다가 남에게 알리는 아들이 있다면 그 또한 욕을 먹어야 한다.

듣고 본 대로 거짓 없이 말한다고 다 참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남을 이롭게 하는 말이 참말이지 남을 병들게 하면 참말이 거짓말보다 더 무서운 짓을 범할 수도 있다. 선생이 이러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주자 몇몇 아이들은 스스로 그 선생을 찾아가 울면서 자기들 아버지가 몸져 누운 줄 모르고 염탐꾼 노릇을 했노라고 실토를 했었다. 그러나 선생은 무서운 소장에게 불려가 혼쭐이 났으며 반동분자라는 폭언과 함께 건방지게 공무방해를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웠던 세상인가? 요사이 남부군이니 빨치산이니 떠들면서 미화하려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지만 그들은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리산 부근에서 당해 본 사람들은 그 당시 전투경찰도 싫고 빨치산도 싫었다고 할 만큼 몸서리를 쳤던 것이다. 그들이 한 말은 그 진저리 나는 일을 미처 모르고 멋대로 한 소리들일 것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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