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이사를 했다. 시외버스·고속버스터미널 바로 옆인 데다 지하철도 가까이에 있는 아파트라 편리할지 모르겠다 싶어 집을 한 번 보러 왔다가 그만 순식간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난생 처음 30층 고층에서 지내보니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확 트인 전망과 저녁 불빛이 아스라한 야경이 너무 멋있다. 저녁이면 괜히 옥수수차라도 한 잔 든 채 넋을 잃고 창밖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문득 바라봄에 대해 음미해보게 되었다. 본다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보는 것일 텐데, 눈에 보이는 것도 늘 똑같이 보는 게 아닌 것 같다. 여기 이사 오기 전에도 종종 이 주변을 지나다녔지만 단 한 번도 관심을 가지고 이 건물을 올려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내가 사는 집이 되고 보니까 밖에 나가 있을 때면 늘 이쪽을 바라보게 되고, 근처에 있을 때면 우리 집이 어딘지 층수까지 세어가며 자세히 쳐다보게 된다. 평소 늘 곁에 있어도 관심이 없을 때는 눈에도 안 들어오다가 일단 한 번 내 마음에 들어오게 되니 그전과 판이하게 다르게 보인다.

바라본다고 꼭 눈으로 봐야 되는 것은 아니다. 외디푸스나 '왕의 남자'의 장생은 눈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다가 보지 못할 때 오히려 보게 되는 역설을 말해준다. 두 눈으로 보고도 신탁의 예언대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아내로 삼았던 외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멀게 한 뒤에야 자신을 바로 바라보게 되다. 어릴 때 광대 패를 처음 보고 장단에 눈멀고, 공길과 광대 짓하며 신명에 눈 멀고,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엽전에 눈이 멀고, 왕이 공길이의 마음을 훔쳐갈까 눈멀었던 장생은 진짜 눈이 멀고 난 후 비로소 오직 허공만을 응시하며 자신이 그동안 눈 멀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같은 사실을 보는 눈이라도 살다보면 고쳐지거나 바뀌기도 한다. 예전에 나는 일찍 결혼해 아이 낳고 키우는 친구들에게 생각해준답시고 자아실현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충고하곤 했는데, 생명의 거룩함 앞에 한없이 낮추어진 지금 다시 그들을 만나게 된다면 "와! 정말 대단한 복을 받았네"하고 크게 축복해주고 싶다.

무엇보다 소중하고 신비로운 바라봄은 우리 곁에 영원히 머물 수 없는 존재를 그리는 것과 아직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은 소망을 또렷하게 떠올리는 바라봄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가 마음 속에 누군가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그리움을 머금고 있는 한 그들은 언제나 우리 안에 머물러 있다. 또 아직 눈앞의 현실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고 변함없어 보일지라도 보이지 않는 꿈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지속적으로 그려본다면 '꿈꾸는 다락방'에서 이지성이 소개한 'R=VD'라는 공식처럼 생생하게 꾸는 꿈(vivid dream)은 현실(reality)이 되리라고 믿는다. 영원히 머금을 그리움으로, 평생을 그릴 꿈으로 무엇을 바라볼 것인가?



/황혜영 서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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