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신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마찬가지로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하는 체하며 살아가야 하는 여자도 많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결혼이다. 결혼은 이러한 위장을 완전히 갖춰준다. 비록 사랑하고 있지 않더라도 이러한 형태가 사랑이라고 배우면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안심한다. 젊은 여성 중에는 결혼시키기 위해서 지금까지 길러온 듯한 사람들도 있다. 어버이의 마음은 딸에게 전해지고 그녀는 결혼하는 날 단 하루를 위해 그 이전의 청춘 모두를 투자한다. 가령 돌이라고 하더라도 어릴 적부터 저 상자 속에 든 것은 아이아몬드라는 말을 들으면 돌을 보았을 때 다이아몬드로 잘못 생각한다. 어버이와 자녀의 사랑, 부부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정한 세계에서만 통용된다.

어느 중학생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런 짓을 하면 어머니가 걱정하신다.”고 선생이 말했더니 “마음대로 걱정하시라고 하세요.”라고 그 학생은 대답했다고 한다. 게다가 어버이와 자녀 사이에는 관계가 없고 부부사이에는 관계가 있는 세계도 있다. 부부의 사랑이라든가 어떠어떠한 사랑에 의해 세계를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그것은 마치 세계사가 전에는 유럽사였던 것과 같다. 유럽 사람들에게는 세계는 바로 유럽이었다.

이 세상에는 유럽 이외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이 세계의 표면에서 통용되고 있는 여러 가지 개념은 결국 특수한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럽 사람들이 유럽 이외에도 아시아 또는 아프리카라는 세계가 있고 그 세계에는 유럽과 똑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음을 깨달은 것처럼 인간도 언젠가는 다른 세계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비로소 결혼을 중심으로 한 세계 이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그때란 언제인가? 그것은 결혼을 중심으로 한 세계가 막다른 골목에 이를 때이다. 그때는 자녀 교육의 방식도 달라질 것이다. 그것이 사회 유지를 위해 필요 한가 필요하지 않은가를 따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덧붙여서 말해둔다. 현대인은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면서 자라난다. 저것도 사랑해야 하며 이것에도 성의를 기울여야 한다∙∙∙∙ 는 식으로 너무도 자기의 감정을 남에게 배웠기 때문에 전체가 막연하기만 한 것이다.

우리들이 누구하고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자기에게 정말로 필요한 사람이 누구인가, 자기에게 정말로 가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교양 없는 사람은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교양 있는 사람이 본다면 대담한 일을 태연하게 한다. 예를 들면 18살에 결혼하고 19살에 부모가 된다. 옛날이라면 당연하지만 지금은 역시 이 연령으로서는 너무 이르다. 그러나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그렇기 때문에 거꾸로 가치 없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세상의 체면도 무시한다. 무시하기 보다는 그들의 세계에는 체면 따위가 없다.

근대의 계몽주의(啓蒙主義)는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하다는 착각을 해온 것 같다. 근대주의(近代主義)라는 말로 근대의 모든 것을 일괄한다면 근대주의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바로 이것이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 있을 뿐 아니라 자기는 바라고 있어도 다른 사람은 원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런데 근대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생기는 잘못인 것이다. 성공은 량(量)에 의해 일반적으로 계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행복은 그 사람 혼자와만 관련되는 오직 하나의 더할나위 없는 것이다. 량(量)에 이해 계량되는 이상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에게도 필요한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근대는 나 자신의 고유한 기쁨이나 나 자신의 고유한 괴로움을 무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른바 양식(良識)으로 나타나고 견식(見識)이 있는 체하는 사람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양식이나 세속적 견식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와 똑같이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전제 밑에서 대화를 한다. 아니 더욱 무서운 것은 세상사람 모두가 자기와 똑같이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힘이 있는 자가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 신념을 그들은 “힘”으로 강요하려고 한다. 힘이 없는 여자는 자기가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무척 노력을 했어도 남자는 자기 곁은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자기에게는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었더라도 남자에게는 아무 가치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말릴 힘이 그녀에게는 없다. 그러나 “힘”이 있는 사람은 자기에게 가치 있는 것을 “힘”에 의해 다른 사람에게도 가치 있는 것으로 강요하려고 한다.


인간은 왜 모두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행복을 느끼고 자기와 마찬가지로 불행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인간의 투쟁이란 어쩌면 자기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을 다른 사람도 행복이라고 느끼라고 하는 싸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삶은 자기 본위이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일 뿐이다.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가 지고 갈 뿐이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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