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은 유태의 격언이다. 이 격언의 뜻은 물론 참는 미덕을 강조한 것이다. 꾸준한 인내심이 성공의 열매를 맺게 한다는 의미를 부인할 수는 없다. 어떤 일을 성취하자면 무던히 참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한때 “아더 매캇라는 속어가 유행한 일이 있었지만 그 아니꼽고 더럽고 매스껍고 치사한 꼴을 모두 참아야 한다. 그러나 이 유태의 격언은 무조건 참는 것만이 미덕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 격언을 좀 다른 각도에서 해석하면 “인내는 성공의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도 된다. 모든 일에 있어서 참는 것이 필요하지만 무조건 참는 것은 성공의 절반 밖에 되지 못한다는 또 하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격언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그대로 유태의 가정교육에 반영되는 것으로 보인다. 유태의 가정에서는 먼저 참는 인내력을 키운다.

그것은 우리나라 가정에서의 교육과 유사한 점이다. 그들은 어린이의 식생활에서부터 인내심을 키우는데 주력한다. 우리의 식생활에 비해서 많은 제약을 받는다. 특히 유태교의 명절 중에는 더욱 많은 제한을 받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급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 기간 중에는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무교병(無酵餠)만을 일주일간이나 먹는다. 우리의 경우로 친다면 일주일 동안이나 밥을 먹지 못하고 죽만 먹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어린이들은 처음에 빵을 먹겠다고 조르는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태의 어머니는 무교병이 먹기 싫으면 굶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할 뿐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어린이들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고 일주일간이나 참고 기다리는 인내력을 발휘하게 된다. 유태의 어린이 중에서 편식하는 어린이를 찾기 어렵다는 것도 식생활에 대한 철저한 훈육에 의해서 불만스러운 식사도 참고 받아들이는 인내심을 키워준 데에 그 이유의 일부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스라엘 공화국 히브리 대학에 유학한 한국 학생은 유월절 기간 중에 학교기숙사 식당에서 무교병만 주는데 견디기 힘들었다는 경험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학생들은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고 더욱 놀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묵묵히 참고 견디는 이 힘은 바로 어릴 때에 길러진 힘이다. 유태의 가정에서는 언제 어느 때나 참는 것만이 미덕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 점이 우리의 경우와 좀 다른 것이다. 할 말도 하지 못하고 언제나 묵묵히 침묵만을 지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러기에필요할 때에는 정당한 의사표시를 하도록 가르친다. 형제자매간에는 경쟁의식이 있고 이 라이벌의식 때문에 동기간에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는 현상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 형제간에도 있는 일이다.

성서에는 인류 최초의 형제 가인과 아벨이 등장하는데 역시 라이벌 의식 때문에 가인은 인류최초의 살인자가 된다. 동기간의 다툼은 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온 일이다. 동기간에 싸움이 있어나 말다툼이 있을 때 우리의 가정에서는 흔히 참아야 한다고 타이른다. “형이 져야지”라든가 “형이 참아야 해”하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사리를 따져서 공정한 심판을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무조건 참아야 한다는 것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다. 이에 비해서 유태의 가정에서 동기간의 싸움을 다루는 방법은 좀 특이하다. 한마디로 말하여 쌍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부모라는 재판관 앞에서 언쟁을 하게 하는 것이다. 한참이나 갑론을박이 계속된 다음 부모의 심판이 내려진다. 그리고 일단 심판이 내려지면 더 이상 언쟁이나 싸움을 허용하지 않는다.

동기간의 싸움을 다루는 방법으로서 어느 쪽이 보다 현명한 것일까? 그렇게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한쪽은 형제간의 무조건적인 우애를 강조한 것임에 비해서 다른 한쪽에서는 정정당당한 경쟁을 정당화 시켜준다. 모두 그 나름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의 의욕을 꺾지 않는다는 점에서 생각하면 형제자매간의 경쟁은 어느 정도 용인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경쟁의식과 실제 경쟁을 통한 승패의 경험이 의지의 사람을 만드는데 기여한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유태인 헨리 키신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의 형 월터 키신저와의 라이벌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는 것을 그는 술회하고 있다. 형에게 뒤져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그를 늘 분발시켰다고 말한다. 혼자서 자란 어린이보다 여러 형제 틈에 끼어서 자란 어린이가 훨씬 의욕이 많고 의지가 강하다는 사실은 동기간의 경쟁의식 때문이라는 것을 여실히 말해준다.

이렇게 되면 동기간의 경쟁을 인정하고 그들이 싸울 때에 무조건 참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당한 생각을 솔직하게 발표하도록 하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은 우리가 참고해야 할 일인 것 같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쟁이 허용될 때에는 기본적으로 충족시켜 주어야 할 조건이 있다. 하나는 승패의 경험을 비교적 균등하게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이다. 경쟁에서 늘 이기는 경험만을 하게 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늘 지는 경험만 하게 되는 것은 더욱 나쁘다. 결국 의욕을 상실시키고 소극적인 성격을 가지게 만든다. 역시 경쟁에서 이겨보기도 하고 져보기도 하는 자연스러운 상태가 이상적이라고 할 것이다. 또 하나는 협동하는 마음을 그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경쟁이 허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경쟁과 협동을 대립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경쟁이 가열되면 협동을 해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협동과 경쟁을 동시에 경험시켜야 할 교육적인 문제가 일어난다. 우리나라의 학교교육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의 하나가 바로 이문제이다. 협동의 경험을 주지 못하고 경쟁의 기회만 주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고등학교나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계속해서 점수에 의한 경쟁만을 위하여 모든 정력을 바친다. 이것은 결코 경쟁의 경험을 바르게 주는 것이 되지 못한다. 어린이는 협동과 경쟁을 동시에 경험해야 한다. 그래야만 의욕이 있고 자신감이 충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동시에 이기적(利己的)인 아집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과 협동할 줄 아는 원만한 성품을 지니게 된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가 없다. 친구는 그래서 돈보다 좋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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