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 1.68㎞·최고 높이 13…사적 235호 지정
서문입구 바위 위 김생 필체 '아미지' 등 유명
대야리 고분군 중심 '역사테마파크' 건설 추진
여행은 즐겁다. 특히 반가운 사람들과 '역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면 더욱 의미있고 행복한 일이 될것이다. 충북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산울림 시낭송회(회장 박태언)' 회원들이 보은의 삼년산성에서 시(詩) 낭송을 한다는 연락이 왔다. 성에서의 시 낭송, 어쩐지 환상적인 무대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삼년에 걸쳐 쌓은 성(成), 삼년산성. 왜 하필 삼년이었을까. 우리 민족은 삼(三 )을 좋아했다. 내기를 할때도 삼세번이고 아기를 점지 해주는 신을 삼신(三神)이라 불렀다. 고을의 수령은 3년에 한번씩 교체됐으며 신(神)에게 절을 할때 세번한다. 특히 삼세번은 공정한 평가를 위해 세번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어서 배려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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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은 후에 충주 북진(北津)에 있는 절에서 중이 되었다. 중이 된후 삼년산성에 와서 아미지, 유사암, 옥필 등의 글씨를 남긴 것으로 보인다. 오정산의 본래 주인은 백제다. 후에 신라 손에 넘어갔으며 신라와 백제는 이 삼년산성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삼국시대 이후 고려, 조선 시대에도 이 성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조선시대 토기 등이 많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최근 삼년산성 앞 대야리 일대에 1600기의 고분군이 확인됐다. 이 고분군을 중심으로 보은군은 '역사테마파크'로 건설할 예정이다. 현재 학술조사와 고분복원 사업을 시행하고 있으며 역사테마파크가 완공되면 전국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충북의 명소가 될것이다.
우리 일행이 성을 내려올 쯤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듯 저녁노을이 불타고 있었다. 성이 건설된후 수백년간 이곳에는 이처럼 붉은 노을이 물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군사들은 전쟁의 참화속에서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고향에 두고온 부모 형제를 그리워 했을 것이다. 일정상 산성에서 시 낭송을 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주 의미있는 여행이 되었다.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되면 또 와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우리 일행은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