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내 친구가 살던 곳은 지금은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카인과 아벨' 촬영지이며 서민들의 일상을 담은 벽화로 알려진 수암골이다. 하지만 그곳은 6·25 전쟁이 끝난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포로 출신들이 울산의 한 육군병원 앞에서 천막을 치고 고달프게 살아가다 우암산 자락으로 이주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냈던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다. 내가 살던 시청 옆 방아다리 부근은 기찻길이 있고 실개천이 흘렀다. 맑은 물 속 붕어·미꾸라지도 잡고 잠자리채 들고 잠자리를 쫓다 지치면 나는 기찻길 옆에 핀 이름 모를 꽃들 속을 날아다니는 벌을 잡아 벌침을 빼다 쏘여 울고도 부어오른 곳에 된장을 바르고 또다시 기찻길을 향해 그 아이와 뛰어놀던 곳이다.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고 향기가 코끝을 스칠 때면 그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음악시간이었다. 지금도 성함이 기억나는 은사님. 김영숙 선생님께서 풍금을 켜시며 '코끼리 아저씨'를 가르치고 있었다. 선생님은 짝꿍과 함께 차례로 노래를 부르라 하셨다.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었고 갑자기 오줌까지 마려웠다. 평소 야무지고 똑똑했던 그 아이도 안절부절하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니 숫기 없는 나는 거의 사색이 됐다. 풍금 소리에 맞춰 나는 모기 같은 소리로 "코끼리 아저씨~"하고 한 소절을 불렀는데 그 아이는 아예 입을 열지 않아 그만 노래가 중단됐다. 선생님께서 다시 부르라고 재촉해 다시 부르다 그 아이가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엉겁결에 설움이 북받쳐 그만 따라 울고 말았다. "코끼리 아저씨~" 엉엉 울고 "코가 손이래~" 흑흑 울고,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수업에 참관했던 어머니들이 교실 뒤에서 배를 잡고 웃으셨다. 그날 이후 그 아이와 나는 더욱 가까워졌다.

어느 날 그 아이가 낡은 바가지를 들고 우리 동네를 찾아왔다. 그 시절 부모님이 모두 공무원이라 배고픔을 모르고 자란 나는 그 아이가 왜 그러는지 잘 몰랐다. 마음씨 고왔던 큰 누님이 그 아이를 불러 배불리 먹이고 바가지에는 하나 가득 밥을 싸주었다. 그 후 가끔씩 우리 집에 들러 밥을 먹곤 하던 그 아이는 어느 날 향기 좋은 아카시아 꽃을 큰 자루 가득 따왔다. 우린 방안에 아카시아 꽃을 가득 풀고 먹으며 목걸이를 만들어 동네 친구들에게 나눠줬다. 그렇게 친했던 그 아이는 가정이 어려워 5학년때 학교를 그만뒀다. 그 후로 난 그 아이를 볼 수 없었다. 몇 년 전 내가 근무하는 차량등록사업소로 낯익은 민원인이 민원실을 방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록서류를 보니 코끼리 아저씨 노래의 그 친구였다. 훤히 벗겨진 이마, 중후한 모습, 고생을 한 듯 했지만 모터 수리점을 운영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는 친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지금도 난 아카시아 향기 가득한 5∼6월이면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유년시절과 기찻길이 있고 맑은 실개천이 흐르던 청주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안효원 차량등록사업소 검사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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