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소는 다른 가축과 달리 위생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우유를 통해 사람에게 매개될 수 있는 전염병을 검사하고, 착유장(窄乳場)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20여 년 전, 젖소 위생업무를 담당하면서 미호천 너른 평야의 한가운데에 있던 토성부락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의 토성부락은 10여 호의 주민들이 논농사와 밭농사, 가축을 키우며 촌락을 이루었고, 동네를 빙 둘러싼 성벽에 울창하게 자란 나무들이 마을을 포근하게 감싸 주었다. 보통 마을과 다른 특이한 풍경의 토성부락은 내게 오랫동안 기억된 곳이었다. 유월의 하늘과 들녘이 싱그럽던 어느 날, 망초 꽃이 지천으로 핀 미호천 둔치를 걸었다.

문득 토성부락의 옛 기억이 떠올랐다. 이 들판 어딘가에 있었는데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첫 방문의 기억을 더듬으며 들판을 찬찬히 살펴보던 중, 논 가운데에 잔디밭 언덕 구조물을 발견하고 그것이 곧 예전의 토성부락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토성부락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뀌었다. 성 안에 있던 마을과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없고, 간결하게 다듬어진 정방형의 성벽과 네 개의 문, 각각의 문을 가로지르는 열십자의 길과 성위에 소나무 서너 그루가 전부였다.

토성은 그간 고고학적 발굴과정을 거쳐 사적 제415호 지정되었다. 더 이상 과거의 토성부락이 아니라 '정북동 토성'으로 새로 태어난 것이었다. 규모는 비록 작지만 후삼국시대에 축조하였으며, 가장 원형의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단다. 정북동 토성은 천년 만에 제 모습으로 돌아 온 것일까? 20년 만에도 이만큼 바뀌었는데, 천 년을 거스른 모습은 쉽사리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만 고증자료에 따라 추정해보면 성 안에 주거지와 창고, 돌무덤 등이 있었고,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었으며, 정방형 성벽의 네 귀퉁이에 각루(角鏤)와 성 외곽에 해자(垓字)까지 갖추어 성으로써의 위엄을 갖추었다고 한다. 웬만한 고장에 하나 둘의 산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우리 고장에는 더 많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산성들의 의미는 전쟁이 아니겠는가 싶다. 산성을 볼 때마다 전쟁의 역사로 점철된 민초들의 애환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들판에서 만난 정북동 토성에서는 오히려 평화를 느꼈다. 짐작컨대 정북토성은 전쟁의 기능보다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식량을 보관하던 그런 곳이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지금껏 고증된 대로 각루도 세우고, 성문을 세우고, 구조물을 채우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조감도라도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으로도 정북동 토성은 아름답기에 부족함이 없다. 토성에 머무는 동안 간결함과 비움에 대한 여운이 흐르는 잔잔한 감동을 맛 볼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조들의 숨결을 지척에서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삶에 지친 현대인에게 필요한 힐링 장소가 멀리 있겠나 싶다.



/박재명 충북도 동물방역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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