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학 2학년 때 사춘기가 온 것 같다. 그 당시 옆집 사는 고등학교 3학년 누나를 좋아했는데 이 누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세수를 얼마나 자주 했는지 모른다. 또 이 누나가 내 작은 누나와 친해 우리 집에 놀러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셋이서 한 이불 속에 누워 공부한 적도 많았다. 그때 그 누나 발에 내 발을 살며시 갖다 대고 가만히 있으면 그 누나 발에서 전달되는 피부 접촉의 강한 전기가 내 온 몸을 휩싸고 도는데 지금도 그때를 떠 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직도 이 누나를 생각하면 황홀한 기운이 내 온 몸을 파고든다. 지금은 환갑이 됐고 손자·손녀까지 둔 할머니이겠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어느 날은 문득 인터넷에서 이름을 쳐보는데 검색이 안 되는 것을 보니 조용히 가정주부로 살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해 본다. 아무튼 이때 좋아했던 노래 중 하나가 윤형주씨가 부른 '우리들의 이야기'였다. 아주 서정적이고 감미로운데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이 노래를 가끔 부른다. '밤하늘에 별만큼 이나 수많았던 우리의 이야기들, 바람 같이 간다고 해도 언제라도 난 안 잊을래요'가 후렴구인데 하도 세상 험하게 살아 그런지 이 노래 하나만 불러도 영혼이 정화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든다. 어찌 보면 사춘기 시절처럼 아름답고 순수하게 살지 못 하는 내 삶이 어느 날은 부끄럽기까지 하다. 아니, 어느 날은 내가 나쁜 놈이 아니라 세상사가 참 독하고 힘들다 보니 이리 사는 것 아닌가 합리화도 해 보지만 이러면 이럴수록 더 비참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얼마나 잘 까는지


나는 칼럼 글을 많이 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주로 썩어빠진 정치권, 그리고 사회 현상 중 정말 안 좋은 부분을 심하게 지적하는 식의 내용이다. 그러다보니 지적 당하는 쪽에선 내 이름 세 자만 들어도 정말 기분 나쁠 것 같고 반면 읽는 독자들은 막힌 속이 다 뚫린다고 하신다. 그런데 어제 밤 친한 지인과 술 한 잔 하다가 문득 이 분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썩은 것을 썩었다고 말하고 어둠을 어둠이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니다. 우리의 사명은 그 썩어진 가운데 소금이 되는 것이고 어둠 가운데 빛이 되는 것이다."


-백혈구


더 나아가 어디서 본 글이라고 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신다. "우리 몸의 혈액에는 백혈구가 있다. 그것은 우리 신체에 이상한 병균이 쳐들어오면 그 침입자를 몸 밖으로 밀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백혈구가 침입자를 처리하는 모습을 보면 참 아름다운 사랑이 느껴진다. 백혈구는 '넌 왜 그렇게 더럽니? 넌 쓸모없는 존재야!'라고 병균에게 심한 욕설을 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무작정 싸워서 무찌르는 일도 없다. 백혈구는 병균이 오면 아주 깊은 사랑으로 그를 감싸준다고 한다. 그 침입자는 백혈구의 따뜻한 사랑에 감동해 그렇게 스르르 녹아 버린다는 것이다." 이 아침, 백혈구처럼 사는 삶이 되고자 다짐해 본다.



/조동욱 충북도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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