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배우다 간다고 하였다. 이것은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뜻으로 배워서 깨우쳐야하고 아는 것은 무거워야 하므로 배운 사람은 고개를 숙여야 한다. 상대편보다 윗사람이나 직장 상사가 된다고 해서 아랫사람에게는 먼저 인사를 받아야만하고 아랫사람이 먼저 고개를 숙여야만 된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인사는 먼저 보는 쪽에서 하는 것이 좋고 같은 위치에서 행해진다면 당연히 아랫사람이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한다.

공자 말씀에도 세 사람이 모이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하였다. 즉,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듯이 아랫사람이나 윗사람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이면 반드시 타인에게는 자기가 모르는 것이 있고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다. 많이 배웠다고 못 배운 사람을 깔보는 행위는 많이 배워서 아는 것은 나을는지 모르겠지만 수양이 되지 않은 미완성으로 볼 수 있다. 상대방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존중하는 태도는 자신의 인격수양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이 아니겠는가. 또한 상대방의 신체적 약점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하는 행위는 부도덕한 소치에서 나오게 되는 것으로 상대방의 수치감보다는 자신의 품위와 인격이 타락하고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모든 예(禮)는 보기에는 같은 예의(禮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람과 장소 그리고 분위기에 따라 인사말이 틀리고 행동거지도 다르게 마련이다. 침통한 분위기에 젖어있는 상가에 가서 상제에게 “축하합니다.”라고 하는 예의는 뺨 맞기 십상이고, 결혼식장에서 “조의를 표합니다.”라고 한다면 이것 또한 정신병자밖에 더 생각하겠는가. 이렇게 똑같은 예의를 표하는 인사말이지만 장소와 분위기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과시적인 예의나 생색을 앞세운 예의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고 대가를 바라는 굴욕적인 예의는 자신의 허약함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진실된 예의는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양심을 속이는 예의는 제아무리 모양새가 그럴듯하여도 참된 예의라고 볼 수 없다. 이렇게 인간의 본의에서 우러나오는 예의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돈이라는 거인 앞에서는 그 모양새가 변질되어 가고 있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의 가까운 주위에서도 돈을 얻기 위해서라면 양심을 팔아야하고 인간의 윤리를 져버리는 행위를 흔히 볼 수 있다. 모두가 입으로는 양심을 내세우고 청렴결백을 주장하지만 많은 양심들이 너무나 헐값에 나돌아 다니는 느낌마저 들게 한다.

우리 사회의 말단 공무원에서부터 이 나라의 최고 직위인 청와대 주인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이 뼈 빠지게 거두어 모은 혈세나 특정 기업체의 각종 이권에서 엮어가는 부스러기 돈이나 아니면 곤경에 처한 어려운 사람들이 잘 봐 달라고 내미는 코 묻은 단 돈 몇 십 만원이라도 자의든 타의에서든 맛보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일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쳐 온 독립투사 예우를 할테니 지금 바로 독립기념관 광장에 모이라고 한다면 모르긴 하여도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가 될는지 아니면 한사람도 없데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천둥번개와 함께 천벌이 내려지는 난리를 면하려면 등장인물이 한 사람도 없는 쪽으로 가는 것이 국가와 민족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편안한 길이 아니겠는가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이처럼 돈은 편리한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흉하게 만드는 마귀와도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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