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성산 전투 패배는 동학 혁명의 분수령

▲목천 복구정 앞에 선 장성균씨. 천안 삼노(三老) 김화성 김성지 김용희가 활발하게 포덕 활동을 펼쳤다.

천안 지역 동학 혁명사는 1. 초기 포교 활동과 동경 대전(東經大全) 간행지 2. 초기 동학교도의 움직임 3.세성산 전투 3. 동학 혁명군 토벌전으로 요약된다.
지난 해 12월, 전국농민회총연맹 천안농민회(회장 전수철)의 주관으로 세성산 전투를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를 계기로 천안 지역 사람들에게 동학 혁명사에 대한 인식을 일깨웠다. 오랫 동안 향토사 연구를 해 온 장성균(천안문화재연구소 소장) 씨는 필자에게 신바람이 나서 이 지역 동학혁명의 현장을 안내해 주었다.
필자가 천안 삼거리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봄비가 흐드러진 꽃을 적시고 있었다.



# 동경대전 강행지 동면 죽계리

천안 지역에는 1882년부터 포덕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어 삼노(三老)라 일컫는 김화성 김성지,김용희가 활발하게 포덕 활동을 벌여 1883년에는 동경대전을 주도적으로 발간할 만큼 교세가 성장했다.

동경대전 간행 장소는 목천군 장내리(帳內里求內里) 김은경(金殷卿) 가(家) 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동면 죽계리로 확인되었다.

동경대전이 목천에서 간행된 이유가 뭘까. 자금확보가 원활했고, 종이 생산지역, 인쇄기술이 축적된 곳, 옛적부터 상감 세공 기술자가 많아서 뒷날 천안 병천 지역에 인장업이 발달한 점을 들 수 있다.

# 허망하게 패한 세성산 전투

천안 목천 전의 고을의 동학혁명군 1,500여명은 8월부터 기포하여 관아를 쳐서 무기를 탈취하여 9월 2일 세성산에 진지를 구축했다.

전투 준비는 천안 삼노(김용희 김화성 김성지)가 맡았고, 총지휘는 김복용 중군은 김영우 화포대장은 원금옥이 맡았다.

당시 세성산 전투는 남북접 대연합군이 공주성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어서 관군의 군사력을 분산시키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세성산의 높이는 해발 220m가 좀 넘는 비교적 야트막한 산이지만 형상이 마치 사자 같아서 만인을 잡아먹을 산 이라고 전해내려 왔다.

산 중턱에는 삼한시대부터 내려오는 농성(農城)이 있었다. 세성산 동학혁명군 진지를 겨냥한 진압군 부대는 중부지역으로 내려온 이두황(李斗璜)군과 청주쪽에서 올라온 관 토벌군이었다.

토벌대에는 이미 일본군이 합세 해 있었다. 토벌군은 세성산의 북편에 2개 소대를 매복시키고, 동북 편에 1개 소대를, 동남쪽에 1개 소대를 배치하고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이윽고 동학혁명군이 깊이 잠든 새벽 5시 쯤, 먼동이 트기 직전에 관군은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다.동학군으로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기습 공격이었다.

10월 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 밤낮에 걸쳐 진행된 전투는 조직적인 훈련을 받고 신식 무기로 무장된 관 일본군에 의한 학살이었다.

기록에 제대로 훈련을 받지 못한 동학농민군은 죽창으로 대결하다가 오합지졸로 퇴각하니 김복용은 주문을 외우도록 권한다.

▲ 북면 사담리 어귀의 나무. 북접의 우두머리 이희인이 처형되었다.


총탄이 빗발치는 산정에서 짚신을 신은 동학농민군은 두 눈을 감고 주문을 외우면서 하나 둘씩 쓰러져가고, 토벌군의 일방적인 학살 속에 세성산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고 하여 당시 처참한 토벌 정황을 읽을 수 있다.

또 문화유적총람에 치열한 싸움으로 피가 성(城)을 씻으며 흘렀다는 데에서 세성이라고 하였고, 시성산(屍城山)이라 부른다고 했다.

당시 동학혁명군 피해는 사망370명, 중경상자 770명, 포로 17명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세성산의 전투가 끝나고 김복용은 그 자리에서, 김화성 나채익 홍치엽 이선일은 24일 천안 남소거리에서, 김용희 김춘일은 27일, 원전옥 김영우는 공주에 압송되어 각각 처형되었다.

당시 진압군의 전리품으로는 소총 140정, 나팔2개, 창 288본, 장전(長箭) 3200개, 청국제 탄환 2만6500발, 대소기(大小旗) 30개, 백미 226석, 현미 367석, 잡곡 13석 으로, 더 많은 날을 버틸 수 있을 만큼 많은 군량과 무기가 남아 있었다.

세성산 전투 패배는 동학혁명사의 분수령이 된 싸움으로, 공주 우금치전투가 패하게 된 원인 중 하나였다.

세성산에서 전과를 올린 관군은 곧장 공주로 내려가 공주 관군과 합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참혹했던 토벌전

지역별 수색 및 살육 일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
다.

① 목천 북면 사담리(사기실) : 세성산 전투가 끝난 다음날 22일 우두머리 이희인 한철영 등 62명을 포살하고 50여명은 훈방조치 한다.

② 병천 도원리 광터골 : 세성산 전투의 효장 김복용 외 20여명과 성명불상의 다른 지역 출신 동학혁명군이 대규모로 처형을 당한 곳이다.

③ 병천 서원말(일명 개목고개) : 세성산 전투의지도자 이희인이 체포된 마을로, 관군과 일군은 마을을 전소시켰다.

④ 광덕 댓거리 : 김화성이 살고 있는 마을로, 이일대의 동학교도 10여명을 체포하여 야산에 목만남기고 생매장해 버렸다. 일부는 즉시 사망했으나 지역 주민들이 이들을 구조하고 장례를 치렀다. 이 사실을 안 관 일본군이 마을을 휩쓸었다.

⑤ 동면 구도1리(보평 마을) : 한유길(본명 한치삼)은 세성산 전투 당시 보급을 담당했던 인물로, 마을 사람들의 원성을 사 타살되었다.

# 황성도ㆍ이천여 직산의 거물급

직산에서 거명되는 동학도인은 황성도(黃聖道), 이천여(李千汝), 서성만(徐成萬), 김성범(金成凡) 등이다.

직산 마정리에 당도한 별기군 부대는 김성범과신일성은 체포 즉시 처형하고 황성도는 관련자를 알아내기 위해 수원에 있는 중군영으로 압송시켰다.

읍내에 당도하여 이천여를 체포하고 집을 수색하여 총 17정 창 89정 철환 500여점 동경대전 판각을 압수했다.

10월 18일에는 황성도 이천여 서성만 등을 판정리 앞 입장천 모래사장에 고을의 백성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공개 처형했다.


채길순 소설가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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