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황혜영교수(4일자)

▲ 황혜영ㆍ서원대 교양학부 교수

프랑스 작가 나탈리 사로트는 자전적 작품인 <앙팡스(유년기)>에서 말이 삶에 가하는 위력과 언어의 구속을 거부하는 저항을 통해 말과 삶에 대한 통찰을 보여준다. 나타샤는 그녀가 어릴 때 이혼한 양친부모를 따라 프랑스와 러시아를 오가며 성장한다. 어느 날, 자기 방에 있던 모든 짐들이 비워져 작은 방으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놀라서 묻자, 새엄마의 갓 태어난 아기와 유모가 그때부터 원래 자기가 지내던 방을 쓰게 되었다고 일하는 여자가 말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갑자기 자기 방에서 밀려나 그때까지 아무도 안 쓰던 좁고 음산한 골방에 넣어진 채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아이에게 그 여자는 애처로운 눈길로 "엄마가 없는 것은 얼마나 불행한가!"라고 말한다.

그때 받은 일격을 가하는 충격은 갑자기 자기 터전에서 밖으로 내던져지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보다 더 타인이 자신에게서 불행을 보았으며, 타인이 말로 규정한 '불행' 속에 갇혔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바빠서 보지 못하지만 일하는 여자만은 얼굴의 이목구비처럼 명백하게 드러난 '불행'을 본 것이다. 잠시 무력하게 주저앉아 있던 나타샤의 내면이 송두리째 뒤집어지고 일어나기 시작한다 : "온 힘을 다해 나는 그것을 밀치고, 찢어버렸다. 구속과 껍질을 뽑아버렸다. 이 여자가 나를 가두는 그 속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이다..."라며 '불행'의 사슬을 부순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으로 압박해오는 말의 위력에 맞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온힘을 모아 저항한다.

그리고 '불행'의 굴레를 과감히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사로트는 과연 '행복'에 대해서는 어떠했을까? 삶을 '행복'의 테두리에 담아 두면 좋지 않을까? 하지만 작가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행복'으로도 삶을 가두어두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뤽상부르 공원 벤치에 누워 곧 새엄마가 될 베라가 읽어주는 동화를 들으며, 주변의 나무들과 잔디, 꽃을 바라보는 순간, 다가온 "결코 다시는 그런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무엇인가 유일한 것,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되살아나 느껴지는 강렬한 감각", 그녀는 그것을 '행복'이라는 단어에 담으려 해보다가 하지 않는다. '엑스터시'같은 너무 강한 단어는 오히려 그것을 주눅 들게 만들고 만다. 작고 소박한 '기쁨'은 그나마 큰 위험 없이 그것에 스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도 삶의 물결이 나를 채우고 넘쳐 온천지에 번져 나와 자연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순간의 순전한 삶을 담을 수는 없다.

'행복'도 삶을 정해진 틀에 가둔다는 점에서는 '불행'과 다르지 않다. 하늘과 맞닿은 산 능선에는 원래 윤곽선이 없듯이, 삶 그 자체에는 선과 악, 옳고 그름, 좋고 싫음의 분별이 없다. 판단하고, 분류하고 나누는 것, 그것은 인간의 잣대다. 불행을 외면하고 행복을 반기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심정이겠지만, 어찌 우리의 삶이 그렇게만 재단되어질 수 있을까? 행복, 불행의 인위적인 잣대를 삶에 들이대어 않는 것, 그것은 어쩌면 불안정하고 무정(無情)한 상태 그대로의 삶을 온전히 체험하기 위한 것이다.

사로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생의 감각을 담아내는 표현은 단정적이고 결정적인 이미지로 규정짓는 대신, 때로는 자신 없어 보일 정도로 주저하고 떨려, 혼돈되고 분열된 양상을 띠게 된다. 그것은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부정확해서라기보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순간 사라지거나 굳어져버리는 스쳐 지나가는 여린 떨림과 같은 생의 감각을 상하지 않게 고스란히 글에 담아내고자하기 때문이다. 삶의 양상들을 구속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는 형태와 표현 속에서 우리는 온전한 삶의 전체를 품고자하는 역설적 소망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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