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청원편> 청주ㆍ청원지역 동학지도자들의 활동중심지였다

▲ 모충고개에 자리한 모충사.


청주 청원 지역은 일찍부터 손병희ㆍ서장옥ㆍ손천민 등많은 동학지도자들을 배출했으며, 광화문 복합상소의 총본부였던 솔뫼 마을, 강외면 병마산 전투,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된 청주성 전투 등 많은 사적이 있다.

# 동학지도자 12인의 활동지

특히 손병희 생가 터 금암 대주리를 중심으로 많은 동학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이곳에 2세 동학교주 최시형이 관아의 감시를 피해 잠행 포교 할 때 수시로 머물렀으며 거물급 동학지도자들이 드나들던 마을이다.

12 인의 동학지도자 중 서우순 서장옥이 먼저 입도하고 손천민 손병희가 입도한다. 서장옥은 남접 동학지도자의 스승이었으며, 강경파에 속한 인물이면서도 최시형의 절대 신임을 받았고, 9월 이후 동학혁명의 폭풍 때 홀연 자취를 감췄다가 1900년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다.

손병희는 최시형으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아 3대교주가 되어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를 재건하고, 3ㆍ1운동을 이끈다.

▲ 병마산 전투에서 동학혁명군에 의해 몰살한 69명의 영병 장졸의 넋을 기리는 비석.
# 광화문 복합상소 중심지 솔뫼

솔뫼(신송리)에 조상 대대로 터 잡고 살아온 동학 후손 강순원 씨에 의하면 당시 진주 강 씨들은 동학 가계를 이루고 있었다.

동학교도가 가난하고 천한 핍박받는 신분이라는 인식과 달리 강 씨의 고조할아버지는 오위장 벼슬을 지낸 양반 출신이었다.

강씨 집안은 가산을 털어 무기를 대었고, 세 형제가 죽음을 당하는 참화를 입었다. 1893년 광화문복합상소의 총본부 격인 동학 대도소는 현재 신송교회 자리인데, 손천민 서병학 등 지도자들이 모여 상소문을 짓고 참가자들을 선발하는 등 복합상소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강 씨 집안은 복합상소와 두 차례의 청주성 전투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동학혁명군들은 솔뫼 마을 뒷산 새터〔新垈〕에서 무기를 제작하고 군사훈련을 했다.

# 청주영 군이 몰살된 병마산 전투

강외면 병마산(兵馬山) 전투는 청주성 전투가 끝나고 나서 10월 1일 동학두령 세 사람이 무심 천변에서 효수된 이틀 뒤인 10월 3일에 치러졌다.

청주영관 염도희와 대관 이종구 교장 박춘빈 등 69명의 청주영 장졸군사는 대전 방면에 집결해 있던 동학혁명군을 진압할 목적으로 대전지방을 순찰하고 돌아오던 중 강외면 병마산에서 동학혁명군과 맞닥뜨렸다.

영관 염도희는 윤음(綸音임금의 편지)을 가지고 동학혁명군을 달래려고 접근했다가 전투가 벌어져 69명의 장졸 전원이 몰살한다.

그러나 이런 기록과 달리 야사(野史)에는 관군들이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상태에서 동학혁명군의 공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사실을 규명하기 어렵지만 무심천변에서 두령들이 효수 당한 데 따른 동학혁명군의 보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어느 지역의 동학혁명군 세력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영병군사의 장례에 부조(扶助)한 청주 청안 문의 등 근동의 양반 사대부 이름과 물목(物目)이 전해지고 있어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이 근동의 동학 세력이 분명하다.

# 쌍다리 전투 청주성 전투 동시에

청주성 전투는 9월 24일 이 지역 동학혁명군의 공격, 11월 23일 호남의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5천여 명의 호남 동학혁명군의 공격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동학 혁명군 쪽에서는 서울을 공략할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점에서 청주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첫 번째 청주성 전투는 9월 24일 쌍다리 장터(현 북일면 세교리) 싸움과 청주성 공격이 동시에 일어난 것 같다.

9월 28일 관보에 청주 읍성(현 도청 부근)을 닷새동안이나 연일 공격했으나 28일 패퇴했다 충청도 관찰사의 장계에 의하면 9월24일 동학교도 수만이 청주를 습격하여 병마절도사 이장회가 친히 전투하여 수십명을 살해하였다. 9월 30일 동학군이 청주성을 습격했으나 성공치 못했다.

10월 1일 병마절도사 이장회군관 이용정 등이 동학두령 이종묵 정필수 정석복을 체포하여 무심천 변에서 군중 앞에 효수하여 경계했다 등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투를 이끈 주체도 다른 동학혁명군 세력으로 보인다. 뒷날 상주 화령에서 체포된 김자선 두령이 쌍다리 전투에 대해서 자백하고 있고, 대주리 출신 최동석 장군도 쌍다리 장터 싸움에서 활약했다는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 청주동헌, 두차례 싸움이 있었지만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 호남 김개남도 日신무기 앞에 맥 못춰

김개남 장군이 이끄는 동학혁명군은 금산을 우회하여 공주 성으로 들어가려다 진잠에서 남북접 연합군이 공주 우금치에서 패했다는 전보를 접하고 청주성 공격으로 목표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11월 13일 기록에 &amp;amp;amp;amp;quot;김개남이 이끄는 5천여 호남 동학군이 성 밖 3리 지경까지 진격해 와서 청주 영병과 왜군이 출동하여 1백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면서물리쳤다&amp;amp;amp;amp;quot; 와 &amp;amp;amp;amp;quot;김개남의 주력은 전부 흩어지고 김개남은 홀몸으로 물러났다&amp;amp;amp;amp;quot; 는 기록으로 미루어 청주성에서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충주(가흥)와 수안보에 주둔해 있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청주성에 집중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 동학정신 산실 금암리 손병희 생가 터

청주에서 증평 가는 큰 도로 가에 손병희 생가 터 안내판이 간신히 눈에 들어온다.

넓은 터에 3세 교주 손병희의 생가와 동상을 세웠지만 공허하기 짝이 없다.

필자의 견해로는 기념관에, 최시형의 며느리가 베를 짜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이 베를 짠다하라 는 직포설법(織布說法)과 같은 정신적 유산도 함께 담아야한다.

뿐만 아니라 근동 동학지도자들의 행적을 연계시켜 풍부한 역사적 의미를 전할 수 있어야 살아있는 역사가 된다.


채길순 소설가 &amp;amp;amp;amp;middot;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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