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 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 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조선경국전 창전…중앙집권 왕도정치 민본주의 토대 마련
한양 천도 요동정벌론 공식화 등 대 내외적 국가기강 확립

조선왕조 수립 후 숭록대부(崇祿大夫)에 봉화백(奉化伯)까지 하사받은 삼봉은 다재다능한 식견과 특유의 돌파력을 활용해 문하부 시중(門下府 侍中) 다음 직책인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최고정책결정기구 수장인 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 국가경제를 총괄하는 판호조사(判戶曹事),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 문헌 책임을 맡은 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 왕을 교육시키고 역사를 편찬하는 지경연예문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 그리고 태조의 친병인 의흥친군위(義興親軍衛)의 두 번째 책임자인 의흥친군위 절제사(節制使)를 겸직하고는 건국의 토대를 다지고 국가기강을 확립하는 정책들을 추진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삼봉은 죽을 때까지의 7년 동안 도저히 한 사람의 능력으로 이루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엄청난 성과를 남겼는데, 가끔 취중에 "한 고조(漢 高祖)가 장량을 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썼도다."고 중얼거렸다는 삼봉이 이룬 사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삼봉은 국가이념을 유교로 삼고 성리학을 정통교학으로 내세우는 한편, 도교와 불교가 지닌 공허한 이론을 비판했는데,『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심(心)]·도교[기(氣)]를 비판하는 한편, 유교[이(理)]가 실천덕목을 중심으로 인간 문제에 가장 충실하다는 점을 체계화했다. 또한 살해되기 직전에는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의 이론을 조목조목 들어 비판을 가함으로써 동양 역사상 가장 체계적이고 수준 높은 불교비판서로 평가받고 있는『불씨잡변(佛氏雜辨)』을 저술하였는데, 이 책은 일련의 개혁운동 가운데서 학문과 종교를 혁신하여 문명개혁을 마무리지으려는 삼봉의 의도에서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삼봉은 나라의 기본을 바로 세우고 통치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창전했는데, 이 책은 조선의 헌법전인『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초가 된 법전으로서『주례(周禮)』의 육전(六典) 체제를 본받아 우리의 현실에 맞게 조정한 책이다. 삼봉은 그 후에도 계속하여『조선경국전』의 보유편(補遺篇)에 해당하는 것으로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재상 제도에 관해서 서술한『경제문감(經濟文鑑)』및 다시『경제문감』의 보유편으로서 중국 역대의 제왕과 고려 역대 왕의 치적을 논하면서 군왕(君王)의 치도(治道)를 정리한『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등을 창전하기도 했는데, 삼봉은 이 저서들을 통해 통치제도로는 중앙집권을, 통치철학으로는 왕도정치와 민본주의를 그 기저로 삼았다.

삼봉은 중농주의를 바탕으로 사전의 혁파를 더욱 확대하여 국가 공전 및 균전을 확대했는데, 이는 수구세력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박탈하여 토지를 국가소유 또는 직접 생산자인 농민소유로의 전환을 꾀한 것이었기에 가장 반발이 심한 개혁정책이었고, 따라서 그만큼 용단이 필요한 정책이었다.

고려의 구신과 세족이 도사리고 있는 개성은 언제나 저항적 기세가 깔려 있었고, 또 새 왕조의 참신한 분위기를 천도로 표현해야 할 필요성도 컸기에 삼봉의 주도로 천도가 단행되었다. 태조 3년(1394) 말에 시작된 천도 작업은 삼봉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단 10개월 만에 완성됨으로써 새로운 왕조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우선 중심 궁궐인 경복궁(景福宮)의 방향을 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을 바탕으로 "인왕산(仁旺山)을 진산(鎭山)으로 삼고 궁궐이 서북방으로 향해야 한다."고 주장한 무학(無學 : 1327~1405) 왕사에 맞서 삼봉은 "전래로 임금은 북쪽을 의지해 남쪽을 향해 앉아야 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쪽을 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으로 하여 남쪽을 향해 남산(南山)을 진산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켰다. 그 외에도 왕실과 백성이 무궁하게 태평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삼봉은 경복궁의 이름은 물론이고 정전인 근정전(勤政殿)·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光化門), 그리고 서울의 모든 궁궐과 성문의 이름을『시경(詩經)』과『서경(書經)』등 중국의 고전에서 아름다운 뜻을 취해 손수 작명하였고 심지어 수도의 행정 분할까지 직접 결정하였다.

삼봉의 이러한 노력은 오로지 이씨 왕조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 왕실을 오래도록 유지하려던 그의 열망 때문이었는데, 그리하여 1396년 10월 29일 태조가 낙성된 경복궁에서 여러 공신들을 불러 연회를 베푸는 가운데, 몸소 '유종공종(儒宗功宗 : 유학(儒學)에도 으뜸이요, 나라를 세운 공(功)도 으뜸이다)'이란 네 글자를 대서특필하여 삼봉에게 하사하기도 했다.

또한 삼봉은 토목공사가 시작되자 공역자들의 피로를 덜어주고 흥을 돋우기 위해 새 도읍에 대한 환희와 희망과 경사로움을 노래한「신도가(新都歌)」를 지었으며, 한양 궁궐이 완성된 다음에는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신도팔경시(新都八景詩)」까지 지었다고 하는데, 한시로는 전하지 않고 국문 악장만『악장가사(樂章歌詞)』에 실려 전하는「신도가(新都歌)」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녜는 楊洲(양주)ㅣ 고올히여
디위예 新都形勝(신도형승)이샷다.
開國聖王(개국성왕)이 聖代(성대)를 니르어샷다.
잣다온뎌 當今景(당금경) 잣다온뎌
聖壽萬年(성수만년)하샤 萬民(만민)이 咸樂(함락)이샷다.
아으 다롱디리
알픈 漢江水(한강수)여 뒤흔 三角山(삼각산)이여
德重(덕중)하신 江山(강산) 즈으메 萬歲(만세)를 누리쇼셔.


왕위에 오르고 얼마 되지도 않아 태조는 삼봉의 동의를 받아 새 왕조 건설에 공헌했던 전비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왕자들은 무시한 채, 후비 강씨(康氏) 소생의 둘째이자 막내로 남달리 영리했던 의안군 방석(宜安君 芳碩)을 세자로 삼고는 삼봉에게 세자의 교육을 맡겼다. 그런데 왕자들이 고려왕조를 무너뜨리는 쿠데타에 참여하면서 각기 거느렸던 사병들을 쿠데타 성공 후에도 해산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있자, 어린 왕세자의 등극에 잠재적 위협 요인이 되리라고 판단한 삼봉은 왕권 안정을 위해 이들의 사병 조직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이 사병(私兵) 혁파 작업이 결과적으로는 뒤에 삼봉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명나라가 새 왕조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따지고 들자, 삼봉은 1397년부터 "요동 출병이 단순한 정벌이 아니라 고토회복"임을 역설하면서 "지난날 중원을 차지했던 거란의 요(遼), 여진의 금(金), 몽고의 원(元)도 외이(外夷)요 조선도 외이인데, 그들이 이룬 일을 조선이라고 못 이룰 바 있느냐?"고 조선사 500년에 찬란하게 빛나는 독보적인 자주사상의 결정체라 할 '요동정벌론(遼東征伐論)'을 공식화했다.

삼봉은 거기서 더 나아가 군사력을 확충하고자 태조의 전폭적 지원을 바탕으로 중국 역대의 병법을 참고하여『오행진출기도(五行陣出奇圖)』·『강무도(講武圖)』등의 병서를 손수 지어 중앙의 관리는 물론이고 지방의 군사들에게 군사연습을 시키는 등 요동 수복 계획을 치밀한 계획 하에 철저하고 집요하게 추진하였다.

그 결과, 원나라를 멸하고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주원장(太祖 朱元璋)조차도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으며, 감히 조선을 공격하지는 못하고 다만 대명온건파인 이방원을 간접 지원함으로써 견제세력으로 활용하는 전략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다가 주원장이 사망하고 그의 손자이자 2대 황제인 혜제(惠帝)와 주원장의 24명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을 둘러싼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돌기 시작하자, 이 절호의 기회를 틈탄 정벌계획이 한창 추진 중이던 1398년, 삼봉이 결국 이방원의 측근인 이숙번(李叔蕃)에게 살해됨으로써 오랫동안 학수고대해온 고토회복의 꿈은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다.

참고로 삼봉이 죽은 다음 해인 1399년에 명나라에서는 혜제(惠帝)와 그의 삼촌 연왕(燕王) 사이에 내전이 발생해 극심한 권력교체기의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는데, 이 내전은 3년 가까이 끌며 명나라 조정을 마비시키다가 마침내 1402년 연왕이 조카를 죽이고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로 즉위하고서야 끝을 맺었다.

그 외에도 삼봉은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일의 어려움을 일깨우는 6개의 악사를 지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교훈으로 삼게 했는데, 먼저「문덕곡(文德曲)」은 태조가 건국 후에 언로를 개방하고 공신을 보전하며 전제를 개혁하고 예악을 제정한 공로를 기린 노래이고,「몽금척(夢金尺)」은 태조가 즉위 직전에 선인에게서 금척을 받는 꿈을 꾸었다는 내용을 담은 노래로 태조가 하늘의 계시를 받아 왕이 되었음을 알리려는 목적에서 만든 것이다.

태조가 즉위 직전에 어떤 이로부터 받은 지리산 석벽에서 나온 참서 내용을 노래한 것이「수보록(受寶)」이며,「납씨곡(納氏曲)」은 태조가 몽고의 유족인 나하추를 격퇴시킨 공로를,「궁수분곡(窮獸奔曲)」은 왜구 격퇴 공로를,「정동방곡(靖東方曲)」은 위화도회군을 각각 찬양한 노래다.

끝으로 삼봉은 역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기 위해 개국 직후에 착수해 3년 만옌고려사(高麗史)』37권을 편찬했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재상 중심 체제를 지향하는 그의 정치의식이 반영되었으며, 뒷날 절재 김종서(節齋 金宗瑞)가 편찬한『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모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성일 저술가ㆍ문화해설가ㆍblog.naver.com/geochi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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