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이경화ㆍ한국교원대 교수ㆍ수학

한국 전쟁 때 한 외국기자가 찍은 사진이 떠오른다.

아이를 등에 업고, 머리에 짐을 이고, 양손에 한 보따리씩 들고 복잡한 시장통로로 걸어가는 한 어머니의 뒷모습. 등에 있는 아이는 수시로 몸을 움직이며 그 어머니의 균형감각을 시험할 것이고, 머리에 인 곡식은 무겁게 그 어머니의 고개를 내리누를 것이며, 양손에 든 바느질감은 그 어머니의 발걸음을 재촉하여 종종거리게 만들어 최고난도의 장면을 연출하였을 것이다.

한국의 과거를 살아낸 여성들이 감당했어야할 멀티태스킹 상황에 비하면 요즘은 많이 나아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 업고 설거지하기, 다림질하면서 전화하기, 운전하면서 화장하기, 등 지금도 대부분의 여성은 두 세 가지 일을 동시에 하면서 늘 숨이 가쁘다.

통계청에서 제공하는 자료에 따르면, 이공계를 졸업한 여성의 취업률이 해마다 조금씩 변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낮고, 취업 후 직장을 그만두는 비율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현저하게 높다.

직장여성 중도 퇴직 많아

직장을 그만두는 이유의 대부분은 가족과 육아문제라고 하니 이공계에서 여성의 놀라운 멀티태스킹 능력은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위험한 실험실로 아이를 끌어들일 수도 없고, 고가의 실험재료를 집으로 가져갈 수도 없으니 멀티태스킹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집에서 하는 이미지 실험이나 가족을 방치하고 실험실에서 산 대가는 무능한 연구자나 무책임한 어머니라는 주홍글씨로 남는다.

얼마 전에는 모 과학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이른바 명문대 화학과에 입학하여 공부하던 한 전도유망했던 여학생이 실험실 문화의 남성성에 좌절하고, 학위 취득 후 연구와 가정을 다 추구할 수 없어 현모양처의 길을 택한 선배의 모습에 실망하여 화학자의 길을 중도 포기하였다는 사례를 전해 들었다.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직장을 구하기도 전에 현실을 파악하고 길을 바꾸니 요즘 학생들은 현명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2002년 12월에 제정하고 2003년 6월부터 시행한 여성과학기술인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비롯한 각종 이공계 여성 관련 정책이 얼마나 실효성이 없는가를 한탄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석해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자신의 재능 부족 때문이 아니라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또는 너무나 뚜렷하게 암담한 미래 때문에 여성과학기술인의 길을 포기한 그 여학생의 쓰린 가슴이 가엾다.

수원여대 식품과학부의 이영근 교수는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길에 오르고 싶었으나 여성이 혼자 유학가면 양공주가 되기 쉽다는 집안 어른들의 반대로 포기했다고 한다.

반면 바이오 관련 기업의 대표이사인 배은희 박사는 양가 부모님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어 공부도 직장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성공적으로 활동하는 여성과학기술인들의 모임에서 듣는 공통적인 이야기는 한국에서 한 여자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여자의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양성평등 의식 확산돼야

이영근 교수의 경우는 이제 드물어졌고, 배은희 박사의 경우는 비교적 증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성과학기술인들의 모임은 한탄과 각오를 다지는 목소리로 늘 결연하다.

많이 변화하였다고 하지만 아직도 남성 지배가 훨씬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남편은 아내를 특별히 고맙게도 도울 수 있지만 아내는 남편을 당연히 기본적으로 도와야 하는 것이 기본 관점인 것 같다.

멀티테스킹 능력에도 한계는 있는 법. 소소한 전략 변화가 아니라 양성평등에 대한 기본 관점 변화를 촉구하는 이유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