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포럼>김희정 중부대학교 인테리어학과 교수

이맘 때면 본격적인 입학과 입사가 시작이 되곤 한다. 또 단골 식당의 빠지지 않는 메뉴처럼 신고식을 치루다 다쳤거나 사망에 이르렀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신고식의 유래는 생각 외로 뿌리가 깊다.

신고식은 고려시대 말 과거제도의 비리에서 신참례(新參禮)가 생긴 이후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시대에는 인재를 시험으로 선발하는 과거제도가 공정하게 시행되지 않고, 귀족의 나이 어린 자제들이 실력과 상관없이 가문을 배경으로 급제하는 일이 잦아 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존 관리들은 과거시험을 분홍 저고리에 젖비린내 나는 아이들의 잔치라고 해 '분홍방(粉紅榜)'이라고 비아냥거리며 불만을 쌓아가다, 비리로 급제하게 된 관리들을 골탕 먹이기 위한 신고식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고려시대의 이 같은 의식은 조선시대에 내려와 과거에 급제한 자를 '신래(新來)'라고 칭하고 일단 예문관, 성균관, 교서관, 승문원에 배치돼 지금의 인턴과정을 밟도록 했다.

그러나 배치가 됐다고 해서 자리를 배정받아 일을 할 수는 없었다. 바로 '허참례(許參禮)' 즉 참여를 허락하는 절차를 아직 거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권지(權知)라 불리던 신입관리들은 배속된 부서의 선배 관리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돈을 마련, 선배들에게 잔치를 열어주어야 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따르면 육체적 정신적 학대는 기본이고 온갖 음식과 술, 기생까지 불러야 하는 연회의 모든 비용도 권지들이 지출해야만 했다.

'새로 배속된 사람을 괴롭혀 여러가지 귀하고 맛있는 음식을 졸라서 바치게 하는데 한이 없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한달이 지나도 권지에게 옆자리에 앉아 업무를 익힐 수 있도록 하는 것인 동좌(同座)를 허락치 않고 사람마다 연회를 베풀게 하되 기생과 음악이 없으면 신래와 간접적으로 관계되는 사람에게 끝까지 책임을 추궁했다'고 적혀 있을 정도이니 그 폐단이 실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신래침학은 연회 자리에서 절정에 이른다.

각종 내기가 진행되며 고참은 져도 벌주가 없고 신래가 지면 벌주에다 각종 침학(侵虐)이 이어졌다.

즉석에서 별명을 붙여 그에 어울리는 흉내를 내야 했고 얌전히 말을 듣지 않다가는 뭇매도 다반사 였다. 급기야 단종 때는 허참례를 치르던 신래가 죽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런 고통을 이겨내면 동좌를 허락하는 연회인 면신례(免新禮)를 치른다. 조선 초기에는 허참례에서 면신례까지 열흘 정도였으나 점점 그 도가 심해져 한달이 지나도 면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육체적, 정신적 학대도 문제였지만 대갓집 자제가 아니고서는 허참례에서 면신례로 이어지는 잔치 비용을 대다 파산에 이르기도 했다.

이런 악습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인물 중 하나가 율곡 이이다.

명종 19년 문과에 급제한 이이는 승문원에 발령을 받아 신래로서 허참례를 거부했다. 그 바람에 이이는 한동안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당시 관직에 있던 퇴계 이황이 그 소식을 듣고 한마디 했다.

"신래침학이 무리한 시속(時俗)이기는 하나 그것을 이미 알고 과거를 보지 않았는가?"라고 말이다.

이렇듯 신고식은 동료·선후배간의 맞인사로 매우 오랜 시간을 두고 의례적으로 이루어져 왔고, 사회 곳곳에 이러한 형태의 맞인사가 뿌리 깊이 행해져 시각에 따라서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단편으로 받아 들일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폐단도 말도 많은 우리의 신고식은 이런 부정적인 영향에도 불구 우리 사회에 까친 긍정적 영향도 적지 않았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희정 중부대학교 인테리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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