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 극동대 외래교수 이상주

이상주

극동대 외래교수

2007년 3월 충북대 천문우주학과 이용삼교수는 우암이 화양구곡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흥미위주의 소설도 인과관계를 기본으로 한다. 그런데 그는 학술논문인데도 불구하고 인용자료의 출처도 세부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그런 발상을 하는데 영향을 준 자료도 신빙성이 낮은 2차 자료이다. 심증이 가는 사항을 명증하기 위해서는 신빙성있는 구체적 자료를 인용해야한다.

논문은 타당한 이론에 입각해서 타당한 논리체계에 의해 타당한 결론을 도출하는 과학적 과정의 산물이다.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사회적 조건과 역사적 상황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가 면밀히 추적해야한다. 이는 당시의 실제 사실을 어긋남 없이 올바르게 평가하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우암을 제대로 읽으려면 먼저 우암이 읽은 책을 제대로 읽어야한다. 그 다음 우암의 글과 그 제자들의 글을 제대로 읽어야한다. 필자는 몇 가지 근거를 들어 그 주장의 부당성을제기한다. 첨성대라 명명한 사상적 배경을 통해 검증해보자. 송시열이 1667년에 지은「청주공북루기(?州拱北樓記)」에 " 정사(政事)를 덕(德)으로 하면, 비유컨데 북극성이 그 자리에 있으면 뭇 별들이 그를 안고 따라 도는 것과 같다."라는 내용을 인용했다. 『논어』「위정」에 나오는 말이다. 임금의 덕화의 중요성과 이를 계승실천한 주자의 사상을 산수에의 표상화한 것이다.

또한 화양구곡 참배자에게 그 의미를 교화하기 위한 조치이다. 『화양지(華陽誌)』「황묘사실(皇廟事實)」에 " 문의 편액을 성공(星拱)이라 했는데 논어북진장(論語北辰章)의 말을 취하여 문의 이름으로 명명한 것이다."했다. 「구곡동천(九曲洞天)」첨성대를 설명한 말에 " 아래에 석감(石龕)이 있어 마애(磨崖)하고 황필(皇筆)을 새겨놓은 까닭으로 이름지었다. "라 했다. 실제 우암이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면, 그 사실을 첨성대 아래 잘 보이는 곳에 분명히 새겨놓았을 것이다. '첨성대' 하단 암벽에 새겨놓은 '비례부동(非禮不動)'은 송시열등이 새겨놓았고 새겼다.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 '창오운단(蒼梧雲斷), 무이산공(武夷山空).'도 우암이 썼다고 새겼다. 다음『옥천읍지』 를 주목하자 " 관천석(觀天石)은 가산(佳山)에 있다. 중봉선생이 여기서 천상(天象)을 봤으며, 우암이 중봉선생 유상지석(遊賞之石)이라 썼으며, 후손 석렬(石烈)이 비석을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우암과 관련된 이런 류의 기록은 도처에 산재한다. 우암의 문하생들은 우암의 일상사를 비롯하여, 그 특징적인 면모를 꼼꼼하게 기술했다. 최신(崔愼)은 무려 24년간 우암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기록했는데,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내용을 없다. 『송자대전』과 그 제자들의 문집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첨성대는 낮에 올라가기에도 불안하고 위험한 장소다. 밤에 올라가가는 쉽지 않다. 첨성대는 평지보다 별로 높지 않기 때문에, 그곳에서 관측해도 평지에서 관측하는 것보다 가시범위가 넓지 않다. 따라서 굳이 올라갈 필요가 없다. 필자는 이상의 논거를 들어, 우암은 화양구곡의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하지 않았다고 정중하게 주장한다. 박학군자의 명판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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