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포험> 윤현자 시인ㆍ충북 시조문학회 사무국장

아침저녁 옷섶을 파고드는 찬바람의 시샘에도 불구하고 창밖의 봄은 햇살처럼 환하게 다가오고 있다.

지독히 심했던 황사에도 고결한 자태를 뽐내는 목련이며, 살얼음을 풀어낸 시냇물의 경쾌한 리듬에 맞춰 솜털을 보송보송 세워 노란 꽃술을 내민 버들가지며, 멀리 산등성으로 언뜻 언뜻 보이는 붉은 진달래까지 완연한 봄을 노래하고 있다.

이런 봄이면 가슴 한 구석 맑게 비워지는 느낌으로 한참이나 지난 사진첩을 꺼내 갈피갈피 자리한 기억들을 더듬곤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진첩을 넘기다 십년도 훨씬 넘은 1994년 초여름, 소록도에서 찍은 젊은 날의 추억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모 신문사의 문화탐사단 일원으로 소록도를 다녀 왔었다.

긴 가뭄 끝에 단비 내리는 밤길을 꼬박 달려 이른 아침 녹동항에 도착하여 다시 배로 십여 분 달려간 소록도에선 "나병은 낫는다"는 절규 짙은 푯말이 일행을 먼저 맞았었다.

얼마나 터부시한 병이었으면 섬 입구부터 그런 푯말을 설치했을까?

가슴에 싸한 바람이 일었었다.

어릴 적, 진달래꽃무리 속에 문둥이가 숨어 있다가 어린 아이만 잡아 신체를 훼손한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가슴 졸이며 문둥이는 사람도 아닐 거라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던 적도 있다.

그 후 문둥이가 아닌 정식 병명, 한센병이라는 병명의 환자가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다는 사실과 그 병은 결코 불치의 병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알게 되었다.

지나칠 정도로 정갈하게 정돈된 섬 전체의 분위기와 한 하운 시인의 시 '보리피리'가 아프게 새겨진 시비 앞에선 가슴이 먹먹해져 선뜻 발길을 옮기지 못했었다.

더구나 작고 초라한 성당에서 때맞춰 들려오던 종소리와 성가는 두고두고 귓전에 남아 성당을 지나칠 때면 이명처럼 맴돌았다.

누가 소록도를 천형의 유배지라 했던가! 어둠과 절망의 질곡 속에서도 한 자락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환자들과 그곳에서 참다운 사랑과 인술을 베푸는 많은 종사자들이 종종 전해오는 가슴 따뜻한 소식으로 우리네 팍팍한 일상도 윤기 돌곤 했었다.

얼마전 소록도에서 40여 년간 봉사를 하던 수녀 두 분이 조용히 자기 조국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사실이 있다.

꽃다운 나이에 이국땅에 들어와 오그라들고 문드러진 한센병 환자 치료에 평생을 바친 70대 수녀들은 자신들이 너무 늙어 오히려 환자들에게 부담이 될 것 같고 또 헤어지는 슬픔을 그들에게 줄 수 없어 말없이 떠난다는 짤막한 편지만 남기고 흔적도 없이 홀연히 떠나셨다.

공보다는 치사에 급급한 우리들의 모습을 새삼 돌아보며 반성하게 하는 마리안느, 마가렛 두 수녀님은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떠나셨다.

환자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상처를 돌봐 우리나라 의사와 간호사들로 하여금 소록도에서 참다운 인술을 베풀 수 있게 일깨워 소록도가 더 이상 의료 소외지역이 되지 않도록 온몸으로 실천을 하신 두 수녀님의 평생에 걸친 봉사는 이기심과 다툼으로 얼룩진 우리들의 각박한 삶과 종교, 인종문제를 다시 한번 겸허히 돌아보게 한다.

단지 바쁘다는 핑계로 마음의 여유 없이 건둥건둥 지나온 날들이 새삼 부끄러워지는 이 봄, 자연과 하나 된 그들의 성스런 삶을 가슴속에 고운 울림으로 새겨 때때로 따스한 손길 건넬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해 본다.

/ 윤현자 시인ㆍ충북 시조문학회 사무국장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