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김동민 경제부장

얼마전 참으로 당혹스러운 밤을 경험했다. 새벽 3시 30분부터 중계되는 유럽 챔피언스리그를 시청하기 위해 밤을 꼬박 세웠다. 아시아인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이 유력했던 박지성 선수가 활약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하지만, 퍼거슨 감독은 당시 수비수였던 영국 출신 하그리브스를 박지성의 자리였던 미드필더로 올리고 루니와 테베즈를 투톱으로 하는 4-4-2 전술을 구사했다.

이날 처음으로 미드필더로 올라온 하그리브스는 팬들의 높은 점수를 받을 만큼 분투했고 퍼거슨의 용병술이 적중했다는 평가가 지금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하그리브스의 미드필더 기용은 결론적으로 실패한 전술이다. 최전방 루니와 테베즈 등과 전혀 호흡이 맞지 않았고, 연장전에 이어 패널티킥까지 이어지는 동안 맨유의 패배를 예측하는 절대적인 요인으로 지적됐다. 만약 박지성이 하그리브스 자리에 기용됐다면 어떻게 됐을까. 축구 전문가들은 결과를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전반전에 이미 3~4골 차이로 앞서며 경기를 지배했을 것이라고 분석했었다. 이날 경기는 콧대 높은 유럽의 축구문화를 보여준 보기 좋은 사례였다.

박지성 선발 출전과 맨유의 우승, 그리고 5000만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기를 기대했던 챔피언스리그는 그렇게 맨유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가 아닌 상대방 실수에 의한 승부로 경기자체는 '수준미달'였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세계적인 지도자인 퍼거슨 감독 역시 비 유럽국가에 대한 '인종차별' 의식을 갖고 있음을 시사해준 경기였다. 맨유와 함께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대표 구단인 첼시가 이스라엘 출신 그랜트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부임 첫해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스리그를 동시에 준우승으로 이끈 감독이었음에도 그랜트가 경질된 채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인 명장 '거스 히딩크'의 후임 감독설이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축구를 사상 처음으로 월드컵 4강 반열에 올려 놓은 히딩크가 존경받는 이유는 그에게 인종차별, 출신학교 차별 등이 허용되지 않은 채 오로지 실력과 노력만 보고 선수를 선발하고 전략을 구사한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의 열광적인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박지성, 이영표, 설기현 등이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뭉쳐 프리미어리그를 주름잡는 시대를 상상하고 있다.

이처럼 유럽 빅리그와 미국 메이저리그 등 세계적인 스포츠에 국민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은 왜 일까. 쇠고기 파동과 조류독감, 어수선한 정국, 불안한 경제 등으로 시름에 빠진 국민들은 축구와 야구 등 스포츠가 유일한 위안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시절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 미국 메이저리그의 박찬호와 한국인 최초로 lpga 메이저대회를 휩쓴 박세리 등에 열광이 지금은 박지성과 일본 야구의 새로운 수호신으로 부상한 임창용 등에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스포츠 스타들은 이처럼 탁월한 실력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국에서 성장과 추락을 반복하는 등 고단한 선수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스포츠 강대국의 '인종차별' 속성이 여전한 상황에서 그들은 고군분투하며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잘난척하던 호날두는 패널티킥까지 실축하고도 영웅으로 칭송받은 반면, 그라운드에서 꿈조차 펴지 못했던 박지성은 '개고기송'과 함께 뒷전으로 밀려나는 등 스포츠 강국의 심각한 '인종차별'속에서 말이다. 스포츠와 경제는 비슷한 모양을 갖고 성장과 후퇴를 반복한다.

강국에 의존하지 않고 강국의 장점을 습득하며 자주적인 외교를 통해 우리 고유의 색깔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경제 강국으로 가는 길임을 직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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