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충만' 꿈꾸는 붓의 유희

젊은작가 ③ 강호생


'텅빈 충만'. 동양화가 강호생(46)은 참으로 희한하고도 이율배반적인 화두를 잡았다. 그리고 그 화두를 풀기 위해 지난 26년을 달음박질쳤다.

강산고개를 두 번 하고도 절반이나 넘어온 지금, 수없이 많은 종이와 붓, 생활인으로서의유혹들이 그의 손끝에서 사라졌다.

없어진 건 이것만이 아니다. 가늘고 섬세했던 선(線)도, 일곱가지 컬러풀한 화려한 색감도 함께 사라졌다. 농담을 달리하는 먹과 공간을 구분하는 동시에 단절된 면을 연결해주는 필선(筆線), 세월이 흘러도 멈추지 않는 심장의 쿵쾅거림이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붓이 지나간 흔적...

강호생의 그림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힘(energy)'이라고 할 수 있다. 한지 위에 붓 한번 꾹 누른 다음 일필휘지로 휘갈긴 그림에서는 에너지가 뚝뚝 떨어진다. 그믐달빛의 처연함, 한삼자락의 가녀린 선율이 있으되 가볍지 않으며 뭉툭한 필선이되 두껍지 않다.

이러한 강호생의 그림소재는 참으로 다양하다. 사군자, 풍경, 문인화 등은 물론 잃어버린 고향의 모습과 유년의 추억, 주위에 널부러진 폐품들이 자신있게 등장한다. 여기에다 현대인의 무관심과 외로움이 극대화된 고독을 관념적으로 풀어냄으로써 점차 고립돼가는 사회를 풍자한다.

가로 20m×세로 3m 화폭의 'life is but a dream' 은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현대인의 외로움과 개인주의가 극대화된 작품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50여명이 등장하는데 하나같이 타인에 대한 무관심하고 무표정한 모습이다. 돌부리에 걸려 한 남자가 넘어져 있지만 거들떠보지 않는다. 고작 한명만이 그를 지켜볼 뿐이지만 그마저 남자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는 않는다. 멀뚱멀뚱 바라보는 모습을 통해 현대사회의 개인주의 단면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고 있다.

강호생은 또 주위에 버려진 폐타이어를 그림 속에 등장시킨다. 인간의 이동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타이어가 폐차장의 한 구석에 수북히 쌓인 모습을 한 번의 빠른 붓질로 그어 내린다. 먹의 번짐과 여백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낸 자취가 타이어 형태로 드러난다.

먹과 얼룩 속에 자잘한 붓질은 사라졌는데 붓의 흔적과 먹의 농담에 주목하다보면 타이어라는 대상이 나타난다. 작가는 이 소재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기억과 망각의 사이를 오가며 오랜 잔상으로 남게 함으로써 환경문제를 고민하게 만든다.

지난해에는 젖소의 유방을 클로우즈업한 '젖소 시리즈'를 선보여 관심을 집중시켰다. 성욕과 생명의 잉태를 상징하는 유방을 뒤와 옆에서 바라보면서 나머지는 과감한 붓질로 생략했다. 그러면서도 몸의 균형을 지탱하는 꼬리와 젖소의 상징인 검은 반점, 자양분을 공급하고 쓸모없이 몸 밖으로 배출된 배설물을 진하게 표현한다.

최근에는 '자유와 생명력'을 표현한 작품들을 내놓고 있다. 수묵담채와 아크릴릭, 전통한지와 다양한 재료 위에 생명의 그림들을 풀어낸다.

화폭 속의 텅 빈 동그라미는 음(陰)을, 그 주위에 몰려드는 점들은 양(陽)을 상징한다. 생명의 기운을 더하기 위한 빨강과 노랑, 파랑이 검은 화면 속에서 포인트로 남는다.

잉어의 유연한 몸놀림과 곡선을 통해 펼쳐낸 자유와 평화 메시지도 주목할 만하다. 단 한번의 붓질로 표현된 잉어의 유연함과 마지막 포인트로 그려내는 가느다란 수염 몇 개. 얼핏 검은 붓질이 전부인 그림은 흑과 백, 먹과 여백, 점과 번짐의 조화를 이뤄낸다.

이같은 강호생의 붓질은 모두 일획의 묵필에 담아낸 동양사상에 기반한다. 필선의 생동감을 더하기 위해 여백을 최대한 살리고 화면의 단순화를 꾀한다. 여기에 화폭 반대편에 굵직한 묵필과 가느다란 필선들을 배치함으로써 공간과 공간의 만남, 소통을 추구한다.

세계 속에 여백의 의미, 동양사상을 깊게 심고 있는 강호생은 화폭의 유희를 이렇게 정의한다.

"생략적이고 함축적인 골법에 의한 필묵법으로 필요한 부분의 본질만을 표현하면서도 무한한 배경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텅빈 충만이자 채워진 빈자리요 숨쉬는 공간입니다. 동양화의 유희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성아.사진=노수봉기자




스피드 인터뷰

그의 작업모습은 한편의 행위예술과 같다. 번개같이 내려치고 순식간에 끝나버린다.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작업모습을 감상하기 어렵다. 화면 속 대상을 해체하면서 그림을 완성해 나가려는 주체의 의지 또한 풀어져버린다. 손놀림이 끝난 화폭 위에는 먹과 붓의 스침, 얼룩이 잔해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붓의 놀림을 통해 정신적 유희를 즐기고 싶다는 동양화가 강호생. 그를 주위에선 그를 기인(奇人)이자 반골작가라고 부른다. 멈춰있으려 하지 않고 기성화단의 정체된 모습에 서슴없이 비판을 쏟아내기 때문이다. 청주 예술의 전당 맞은편의 작업실에서 눈에서 불똥이 뚝뚝 떨어지는 작가를 만났다.

▲전업작가의 길이 쉽지만은 않을 텐데. 아픈 기억은 없나.
"신혼시절 때의 일이다. 결혼하고도 경제력을 갖지 못하는 아들과 남편이 미웠을 것이다. 어느날 어머니와 아내가 내 그림을 바깥으로 끌어내 불을 질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홍시빛으로 물든 두 여성의 얼굴, 그 속에 보일듯 말듯 번지는 미소... 오죽하면 저러겠나 싶어 만류하지 못했지만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처럼 완고한 반대를 어떻게 극복했나.
"가장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한순간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신학공부를 시작했을 즈음, 종교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의 물욕의 단면을 보게 됐다. 그의 모습에 너무 실망해 신앙공부마저 접었다. 어찌보면 오늘날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모두 그의 덕분이다. 은인으로 생각한다.(웃음)"

▲인터넷 홈페이지가 인상적이다. 보통실력이 아니던데.
"손장난을 좀 쳤을 뿐이다. 작가의 작품은 언제나 정체돼 있기 마련이다. 그 멈춤에 약간의 장난질로 생동감을 주었을 뿐이다. 플래시 기법이라고 한다. 괜찮게 보이나 보다."

▲동양화는 사군자와 문인화, 산수화 등으로 압축되지 않나.
"동양화의 정신은 여백에 있다. 서양화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 정신과 기법을 유지한다면 소재가 뭐 그리 대수롭겠나. 드로잉 기법을 사용한 인물화나 풍경 또한 동양화의 한 범주에 속한다. 우주색인 먹의 농담을 통해 비어 있으되 전체를 지탱하는 수레바퀴의 진리를 찾고 싶다."

[작가약력]
▲1962년 청주생 ▲홍익대 동양화 전공 ▲청주대학교 대학원 회화과 졸업 ▲kbs 자연환경 미술대전 대상(2002) ▲충북예총 우수예술인상 ▲한·일 교류전(일본 오사카) ▲중·한 미술교류전(중국 하북미술관) ▲오늘의 한국 현대미술의 단면전(미국 뉴욕) ▲한·일-물, 불 그리고 바람(부산 시립문화회관) ▲세계관적 미의식과 조망전(서울 일민문화관) ▲21c 한국정예작가 초대전(서울시립미술관) 등 개인전 8회, 그룹.초대전 160여회.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