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을 동이(東夷)라 한 것은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데서 붙여 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활을 잘 쏘았는데 당시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사람을 가리켜 '주몽'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우물가 아낙의 머리에 이고 있는 동이를 쏴 다시 시위를 당겨 새는 물을 막았다는 설화를 보면 그 솜씨가 신기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겠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부여는 궁시(弓矢)와 도(刀)와 모(矛/창 일종)로써 병기를 삼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가 있었다"라고 기록된다. 활이 부여의 제일 무구였음을 알려 주고 있다.또 "...낙랑단궁(樂浪檀弓)이 이곳에서 나온다" 라고 하여 좋은 활의 실재를 증명하고 있다.

고구려의 활은 그 성능도 뛰어났던 모양이다. 동이전에 보면 "고구려 별종(別種)이 소수에 나라를 세웠는데 이로 인해 나라이름을 소수맥(小水貊)이라 하며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貊弓)이 이것이다."라고 했다. 또 한 기록에는 "한나라 헌제(獻帝) 건안 10년 처음으로 익주(翼州)를 정하니 예맥(濊貊)이 질 좋은 활을 공물로 바쳤다."라고 나온다.

삼국지 우부강표전(虞溥江表傳)에 "오나라 손권(孫權) 때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 각궁(角弓)을 바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손권이 산 시기는 3세기 초이므로 이 때에 벌써 고구려 벽화에 모습이 보이는 소위 '각궁(角弓)'이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을 통일 한 신라의 활은 어땠을까. 중국인들이 제일 공포로 여긴 것이 신라 활이었다는 것이다. 신라에서는 소위 활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까지 있었음을 기록은 알려 주고 있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보면 이궁(二弓)이라는 부대가 편성되어 있었는데 진덕여왕(眞德女王)대 처음으로 한산주(漢山州)에 설치하고 진평왕(眞平王)대에는 하서주(河西州)로확대하였다고 한다.

궁술(弓術)을 관활하던 군사는 법당주(法幢主)에 예속된 노당주(弩幢主) 15명, 법당감(法幢監), 법당두상(法幢頭上), 법당화척(法幢火尺)에 각각 예속된 45명, 그리고 법당벽주(法幢酸主)에 딸린 노당(弩幢) 1백35명이 있었다. 이를 보면 화살 부대의 정원이 2백명 가량 이었음을 알려준다.

신라 때는 활을 응용하여 만든 포노(砲弩)라는 무서운 신병기가 있었다. 이 포노가 매초성 전투에서 20만 당군을 궤멸시키는 결정적 병기였을 것으로 평가 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보면 "진흥왕(眞興王) 19년(558AD) 봄 2월에 나마(奈麻) 신득(身得)이 포노를 만들어 바쳤는데 성 위에 설치하였다."라고 기록된다.

조선시대의 활은 그 용도에 따라 군궁(軍弓)과 평궁(平弓), 예궁(禮弓)등으로 나눴다고 한다. 평궁은 주로 활쏘기 연습에 사용하는 활이며 예궁의 본래의 이름은 대궁(大弓)이다. 조선시대에 군궁은 주요 무구였으나 임진왜란 때 조총과 대결 무참히 패배한 이후에는 의전 장식 심신 수련의 도구에 그쳤고 전투현장에서 사라지는 운명을 맞게 된다.

조선시대 실전용 활이 일본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소장 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야스쿠니신사는 얼마 전 원나라 군사와 고려군의 합동 공격을 막아낸 가미카제라는 의미로 유물을 전시하면서 일왕이 썼다는'적국항복(敵國降伏)'이라는 글씨 바로 옆에 조선시대 원수 복장의 갑주, 투구, 그리고 실전용 각궁을 진열했다고 한다.

시대적 고증도 맞지 않거니와 일본 군국주의 망동이란 치졸한 의도가 엿보여 씁쓸하다.

/이재준 언론인ㆍ前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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