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과 명랑의 차이

유인순

몇 년 전 나는 몹시 우울했었다. 주말에 남편이 집에 올 때쯤이면 머리도 빗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고 구겨진 운동복을 아무렇게나 걸치고 있었다. 아파트 베란다의 블라인드를 내리고 두꺼운 커튼을 쳐 집안에 들어오는 햇살을 모조리 차단했다. 흑인영가나 뉴에이지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종종 눈물을 흘렸다. 내게 흥미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자신의 삶조차 어찌할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부정적이고 자기비하적인 생각이 나를 눌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남편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어 그를 괴롭히는 일 뿐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어질 인자에 순할 순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 주셔서 그랬는지 어질고 순하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내 인생을 지배했다. 마치 연속극의 착한 왕비나 조강지처들처럼 인내하고 순종하며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닥친 내 생활은 그런 생각들을 더욱 견고하게 해 주었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말대꾸도 하고 부부가 맞지 않으면 이혼을 하기도 하는 세상이지만 그것은 내게 불가능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착한 며느리는 시부모님을 공경해야하고 그것이 마음에 없는 일일지라도 남에게 마음을 들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를 부리고 누르고 사는 삶 보다는 오히려 억압당하는 것이 편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마음을 지배해온 가치관이기 때문에 그 틀을 벗어날 용기가 없었다.

결혼하자마자 나는 나무꾼이 되었고 논에 나가 벼를 보살피고 밭을 매는 농부가 되었으며 염소며 송아지를 기르는 목부가 되었다. 화장하지 않은 투박한 얼굴에 수건을 쓰고 헐렁한 일 바지가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아내야 하는 일이 내게 주어졌다. 시어머님이 구박을 하면 부엌에서 울음을 훔쳤고 손은 터지고 발바닥은 갈라졌다. 공동우물터에서 두꺼운 얼음을 방망이로 깨고 빨래를 했다. 새는 고무장갑을 때문에 손이 곱아 손가락에 얼음이 박히기도 했다. 내게는 겨울만 그렇게 혹독한 것이 아니었다. 봄부터 늦가을까지 들판의 일들은 나를 절망하게 했다. 새벽에 눈을 뜨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노동만이 나를 기다렸다. 스무 살 갓 넘은 젊은 여자가 견디어내기에는 형벌 같은 시간이었다.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이 한꺼번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쯤부터 펼쳐질 것인지, 그런 시간들이 내게 올 수 있기나 한 것인지 아득하기만 했다. 나를 둘러싼 일상은 매순간 내게 인내와 순종을 요구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는 새 아파트로 이사를 했고 시골 농사는 모두 소작을 주었다. 집안 어른들도 그간 애썼다며 치하를 했고 성당 교우들도 오랜 간병기간 내내 무던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스무 살부터 서른여섯 살까지 내 어깨를 짓누르던 수 많은 일들이 일시에 바람처럼 흩어졌다. 고생이 끝난 듯 했다. 누구보다 성실한 남편과 그 많은 시골의 전답들, 그리고 어느새 훌쩍 자라준 사내아이 셋, 이제는 내가 바라던 대로 보통의 도시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도 괜찮았다. 그것이 쇼핑이든, 여행이든 아니면 호사스런 취미생활이든. 그러나 견딜 수 없는 고독으로 나는 우울증을 앓아야 했다. 내 일상을 도둑맞은 것 같은 허전함이 나를 두렵게 했다. 손은 더없이 부드러워지고 발꿈치도 야들야들해졌다. 검은 피부, 푸석한 머리도 윤기를 되찾았지만 내 영혼은 아직도 복종하고 견디어야하는 일에서 헤어 날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엊저녁과 다름없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거실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 너무 생경했다. 지쳐 잠들고 깨어나면 오줌으로 휘말아놓은 이부자리를 빨고 오물이 묻은 아버님을 목욕 시켜야 했다.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찌꺼기를 내 놓고 사는지. 밥 달라고, 술 달라고 소리치는 아버님의 고함소리에 정신 줄을 놓을 것 같은 소란함이 일시에 숨죽어 버린 듯 정적이 감돈다. 지나온 인생에 대한 분노가 무의식적으로 나를 향해 폭발해버린 것일까? 고통스런 상황이 없어진 것이 오히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익숙한 상황에 대한 낯 설음 때문이었을까. 여러 차례의 입원과 상담치료를 한 후 나는 겨우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너무 자주 그리고 크게 웃는다. 이제는 웃는 모습이 가장 자신 있다. 세상이 마치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남향 거실에 쏟아진 햇살이 눈부시다. 베란다 빨래걸이에 삶아 빤 수건이 목련처럼 화사하다. 유리창처럼 투명하게 마음을 맑힌다. 우울과 명랑사이에는 커튼 사이에 둔 햇살 한줌의 차이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참으로 맑은 날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