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을 들라면 당연히 광화문사거리를 의연하게 지키고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다. 전자는 문(文)을 대변하는 성군이요, 후자는 무(武)를 상징하는 무관이다. 세종대왕이 역사에 길이 빛나고 만백성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는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치세를 피로 물들인 아버지 태종의 역할이 컸다. 왕자의 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태종 이방원은 형 정종을 잠시 내세우긴 했지만, 왕위에 오른 후에는 외척을 제거하고 세종의 치세에 걸림돌이 될 만한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스스로 상왕의 자리를 자처하고 나섰던 인물이다.

부친에 의해 처가가 몰살당하는 고통을 딛고 일어서 백성의 아픔과 설움을 이루만지기에 혼신의 힘을 다한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우리의 문자, 한글을 탄생시켰다. 한글만큼 과학적인 근거가 확실한 표음문자는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세계 언어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 한글을 만들기 위한 세종의 노력을 말해준다. 세종은 문치에만 힘쓴 것이 아니다. 그는 압록강변에 4군6진을 설치하고 영토를 확장시키는 국방에도 힘썼다.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물을 등용한 덕에 장영실 같은 인재를 얻어 과학의 발전도 이룩했다. 동시에 학문과 문화예술의 발전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된 후 정음(正音)으로 기록된 최초의 문헌인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조선시대 악장(樂章) 문학의 대표 작품인『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이 그것을 보여준다. 세종이 성군인 것은 한글 창제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위대한 것은 힘없는 백성을 내 자식처럼 아끼는 애민(愛民)정신 때문이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이요, 무엇보다도 분야에 치우침이 없이 균형적인 발전을 이룩한 업적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고구려를 침범한 제왕으로 기억되는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성당(盛唐)의 기틀을 마련한 성군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행사의 주제가 성당문화의 재현인 것은 지금의 중국이 성당문화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은 아버지 이연(李淵)을 도와 수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세운 일등공신이다. 그런 그가 황위에 오른 것은 형을 베어버린 현무문(玄武門)의 난을 통해서다. 마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조선의 태종과 흡사하다. 그러나 피 냄새를 씻어내고 성군이 되기 위한 당 태종의 노력을 담고 있는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이후 중국 황제들의 거울이었다. 그를 성군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형의 우수(右手)였던 학자 위징(魏徵)이었고, 반대파였던 위징을 품은 태종 자신이었다. 태종이 예술을 논한 사람은 당대의 명서가 우세남(虞世南)이었다. 그가 임종할 때 곁을 지키며 "그대가 없으면 누구와 서書를 논할 것인가"라고 슬퍼했던 태종이었다. 스스로도 명서가였던 태종의 문화예술에 대한 열정은 중국을 대표하는 명서가 왕희지를 서성(書聖)의 반열에 올렸고, 왕희지의 진적 <난정서(蘭亭序)>를 자신과 함께 묻어달라는 유서를 남기기에 이른다. 물론 비단길 없이는 성당의 문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예술에 대한 태종의 열정이 없었다면 성당은 중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에게는 당연히 국방이 중요하고 경제가 중요하다. 그렇다고 학문이 소홀히 취급되고 문화예술이 말단으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학문과 문화예술은 경제가 무너진 후에도 나라를 지탱해 주는 정신적인 지지대이기 때문이다.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경제 때문에 국방 때문에 문화예술을 홀대하지 않는다. 문화예술에는 지속적인 관심과 투자가 필요하다. 그 효과는 훗날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현숙 이천시립월전미술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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