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열기가 냉기를 만나서 식어가고 빛이 어둠을 만나서 사라지며 불이 물을 만나서 사라지는 것이 법이다. 그리고 냉기가 열기를 만났을 때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어둠이 빛을 만났을 때 색상이 일어나는 것이며, 물이 불을 만났을 때 모양이 나눠지는 것도 법(法)이다. 또한 양(陽)이 빛으로써 사해(四海)까지도 널리 아름다운 것이라면 음(陰)은 띠를 형성해서 사해를 연결하고 어울림을 주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속성을 말할 때는 밝으며 높은 것이라고 이름을 하고, 음의 속성을 말할 때는 어둡고 아래의 것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양(陽)이 지나치게 높아지면 만물을 해(害)하는 것이고 음(陰)이 지나치게 낮아지면 만물을 생육(生育)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은 양으로써 충실한 실행을 원할 때는 먼저 아래로는 충실해야 하고 어둠에는 기여를 해야 하며 음에게로의 혜택을 아낌없이 해야만 비로소 적당한 양기(陽氣)의 실행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하나의 음(陰)에는 하나의 양(陽)이 짝을 이뤄서 새로운 하나가 생겨나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음에 둘의 양이 찾아오는 것은 양이 넘치고 음은 부족한 탓으로 다툼이 생겨나는 것이며, 하나의 양에 둘의 음이 찾아오는 것은 음이 넘치고 양은 부족한 탓으로 시기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양의 기운이 지나치면 반드시 교만을 부르고 음의 기운이 지나치면 반드시 욕심을 부른다.

그러므로 작용(作用)을 할 때는 조화를 이뤄야 하고 감응(感應)을 할 때에는 짝으로 만나야 하며 동정(動靜)을 할 때는 균형으로써 어울려야 하고 대소(大小)를 가질 때에는 형평으로써 나누어 가질 때에 운성(運性)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음양이 조화로울 때에 양의 명지(明智)는 더욱 빛을 발하고 음의 대덕(大德)은 기쁨이 되는 까닭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높은 곳에는 시기와 질투가 도사리는 법이고 낮은 곳에는 멸시와 천대가 도사리고 있는 법이므로 높은 것은 아래로 숙일 때에 시기와 질투로부터 온전할 수가 있고 낮은 것은 위에로 공손할 때라야 멸시와 천대에서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흔히 숙이는 것을 굴복이나 치욕을 당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공손히 하는 것을 자존심이 상하는 것처럼 생각을 하기가 쉽겠지만 스스로가 숙이고 스스로가 공손하다는 것은 균형과 형평을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아래에서 머물렀을 뿐 일어서는 방안이 되고 공손하였을 뿐 적을 만들지 않는 방안이 된다.
 

따라서 공손에는 적이 없으므로 싸워야 할 까닭이 없고 겸손에는 시기가 없으므로 다퉈야 할 이유가 없으며 다툼이 없고 싸움이 없는 사람의 일생은 편안하고 고요하다. 그러므로 복된 삶을 꾸려 갈 수가 있는 마음이 되고 마음에서 안락을 느낄 수가 있는 사람은 최선(最善)의 일생을 보내는 삶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양에서의 겸(謙)과 음에서의 공(恭)은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

/윤한솔 홍익불교대 교수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