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여유 화폭에 … 붓 끝에서 피어난 化려함

▲ 박진명作 '희미하게 반짝이는'.


요즘 세상은 참 바쁘다. 회전바퀴처럼 쉼 없이 돌아간다. 그만큼 사물이 지나가는 속도는 빠르다. 하지만 세상에는 흔들리지 않는 움직임도 있다. 그 작은 움직임은 소리가 없다. 햇볕이 내리쬐고 바람불어 살갗을 간지러울 즈음, 그것들은 조용하게 무희(舞姬)를 즐기며 숨소리 사각거린다.

동양화가 박진명(39)은 이 조용한 움직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그의 그림 속에는 대부분 별것 아닌 것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흔하디 흔한 강아지풀과 억새, 갈대, 여기에다 조롱박꽃도 한몫을 거든다. 한여름 익어가는 청포도 넝쿨도 있고 이것저젓 온통 뒤섞인 풀밭도 있다.

한국화는 일반적으로 여백(餘白)의 미가 특징. 수려한 산수화를 비롯 문인화들은 대부분 묵선과 여백으로 채워진다. 작품소재도 산수화를 비롯 사군자, 문인화 등으로 나눠진다.

하지만 박진명은 여백을 아주 꼼꼼하게 메워나간다.팽팽한 화선지는 그림과 물감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여백이라곤 발견할 수 없다.

물감은 파스텔톤의 부드러움으로 섞는데 완성된 작품은 강렬하고도 화려하다. 마치 아크릴 물감의 서양화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 속에 빠뜨리곤 한다. 작가는 그렇게 동양화의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리고 있다.

박진명 그림의 특징은 무심코 간과된 것들을 포착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채색기법도 참 독특하다. 먹선에 물감을 채색하기 보다는 물감으로 사물을 그리고 그 바탕을 먹으로 칠하기 일쑤다. 그에게 먹빛은 어둠이요, 생명을 잉태하는 가능성이다.어둠은 사물의 형태를 제대로 분간하기 어렵게 만들지만 그 속에서도 사물은 더욱 또렷한 자태를 유지한다.

조롱박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그림 ‘정지와 아른거림(unmoving and shimmery, 91×72.7, 한지 위에 수묵채색, 2007) 등이 그렇다. 박과 넝쿨의 구불구불함을 섬세하게 묘사하면서도 바탕이 온통 먹빛인 이 그림은 수묵에서 검은 색은 가물 현(玄)자로도 쓰이는데 가물가물하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매화꽃잎이 봄날 꽃비로 내릴 것만 같은 작품 '희미하게 반짝이는(shimmery, 122×164 한지 위에 수묵채색 2008)' 또한 바탕을 여백으로 남겨두지 않고 물감으로 채웠다. 바탕을 물감으로 채웠다는 점에서는 앞의 작품과 기법이 똑같다. 하지만 이 그림은 먹으로 매화꽃잎을 하나하나 그려넣은 다음 배경을 붉은색과 담청색으로 채색해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굳이 꽃잎을 붉은빛으로 칠하지 않아도 홍매화의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며 담청색 매화는 꽃잎 사이로 펼쳐진 파란하늘을 연상시킨다.

출렁이는 파도물결의 억새 '희미하게 반짝이는(shimmery, 61×125 한지 위에 수묵채색 2008)은 박진명의 작품세계를 한단계 높여준다. 출렁임도 좋지만 소리 없는 바람에 의해서 파도치는 선율이 매혹적이다. 흐느끼는 듯 몸서리치는 억새의 몸짓도 역동성을 넘어선 자연이 된다.

긴 생머리 흩날리는 소녀의 모습같기도 한 억새 시리즈는 병풍도처럼 연작으로도 이어진다. 4~8폭의 그림들은 모두 하나하나 특성을 담고 있는데 때론 연결된 풍경으로, 때론 독특한 몸짓으로 표현된다. 생명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작가의 철학이 배어나오는 순간이다.

이처럼 박진명의 독특함은 속 장면들은 분명 언제가 본 것들이다. 사소한 일상에서 평범하게 다가오고 마주쳤던 풀과 꽃과 열매가 더욱 친근한 이유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명쾌하지 않다. 분명 본 것이지만 언제 어디서 마주쳤는지 아련한 기억들은 현혹적인 색채와 환상적 분위기를 통해 기이함을 자아낸다.

왜 하필 화분이며 꽃일까? 또 포도열매며 조롱박과 그 꽃일까? 수많은 잡초 중에서 억새일까?

작가에게 화분과 꽃의 의미는 고도로 함축된 한국화의 상징이다. 따라서 동양화에서 산수화나 사군자화가 그림 자체의 조형적 미감을 넘어 의미와 상징을 중시하듯 박진명의 회화 속에서 춤추고 있는 것이다. 꽃과 화분, 포도넝쿨은 구불거리는 선과 잎새의 잎맥, 수풀의 움직임과 꽃의 모양새 그대로 생명과 소외된 것들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박진명은 이렇듯 정지(unmoving)와 아른거림(shimmery), 그리고 이 두개의 조화(unmoving and shimmery)의 세계를 추구한다. 세상의 움직이는 모든 것들은 그의 화폭에 정지되고 만다.

마치 오래된 스냅사진처럼 색이 바랬거나 왜곡된 색채의 장면들은 뇌리 속에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는 잔상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상들에 대한 눈동자를 키울 때 자신의 자태를 당당하게 뽐내는 게 자연이 다가온다. 가던 걸음을 멈춘 박진명이 신풍경(新風景)으로의 거듭남을 꿈꾸며 내뱉는 한마디다.

“화면 밖의 이미지가 화면 속으로 스며들었을 때 이미지는 또 다른 모습으로 재탄생된다. 대상은 하나의 모습을 띤 여러 가지의 이미지로 멈춰서있는 듯 미묘하게 움직이고 꿈틀대며 자신을 드러낸다. 나는 이러한 행위들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스피드 인터뷰

충북 청주 외곽지역의 한 작은 마을. 무심천변을 따라 쭉 뻗은 하상도로 한켠에 느티나무를 신목으로 받드는 이들이 있다. 그 나무그늘 아래의 작은 건물. 예전 마을 주민들의 화합의 산실이었던 마을회관에 몇년 전 젊은 그림쟁이가 들어왔다. 흔한 승용차 한 대 없이 40여분 거리를 버스로 출퇴근하는 박진명이다.

▲ 자택에서 작업실까지 버스로 출퇴근하는 게 불편할 텐데.
"버스를 갈아타는 시간까지 40여분이 걸린다. 하지만 그 승차시간은 내게 여행과도 같다. 차창밖으로 펼쳐진 풍경들을 차근차근 지켜볼 수도 있고 하늘과 바람, 물과 흙을 바라볼 수 있다. 물론 창문을 열고 바람을 담을 수도 있다. 승용차를 유지할 생활적 부담도 한 이유다."

▲ 작은 그림들을 보면 30×33㎝다. 정사각형이 아닌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착시현상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하면 이 사이즈가 사람의 눈에 정사각형으로 보인다. 굳이 이 크기를 선택한 것은 가장 친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각자 작은 그림들이 모여지면 나름대로 또다른 일체감과 통일성을 형성하며 독특한 작품으로 구성된다."

▲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일 것 같다.
"원래 성격이 산만하고 급한 편이다. 그래서 60호 이상 큰 그림을 어떻게 완성해 나갈 것인지 시작할 땐 막막하기도 하다. 하지만 종이 위에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하다보면 어느새 작품은 완성돼 있다. 사실 한 작품에 몰입하지는 않고 서너개의 작품을 채색과 스케치 등을 번갈아가며 지루함을 극복한다."

▲ 불루칩작가들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반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고 보나.
"꾸준하게 작업을 이어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요즘 작가들은 나름대로 소질과 재능이 뛰어나다. 그 재능을 지속할 수 있는 인내심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작가약력
▲1969년 서울 생 ▲경신고.청주대 미대 및 동대학원(회화학) 졸업 ▲조흥문화갤러리(청주, 2002) 청주 예술의 전당(2002) 갤러리 가이아(서울,2003) 갤러리 pici(서울,2007) 인사아트센터(서울, 2008) 등 개인전▲현대미술의 비등과 반등(청원군 대청호미술관, 2005) 한국화 지평전(우연갤러리, 대전 2005) 공주국제미술제(임립미술관, 2007) bule ocen(북경 좌우미술관, 2008) 제8회 한국현대미술제(서울 예술의전당, 2008) 등 단체전 ▲현 한남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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