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좋아 진 것 같은데 아직도 피는 탁한 것 같습니다" 맥을 짚은 한의원장님께서 최종 진단을 내렸다.
 

두어 달 동안 한의원을 다니며 침과 뜸을 하면서 얻은 결과였다. 원장님의 진단과 달리 난 여전히 피로감에 시달리고 있다. 거기에다 근력도 시력도 눈에 띄게 쇠약해 졌다는 것이 자가진단이다.
 

원장님은 경제적 부담이 걱정되긴 하겠지만 한약을 한 재 더 먹으면 좋아 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부언하는 것은 '약을 먹을 때는 푹 쉬면서 먹어야 약효를 봅니다'였다.
 

지나친 과로, 스트레스, 음주, 흡연 앞에서 백약의 처방도 효과를 못 본다는 것이 당연하지만 현실적으로 푹 쉬면서 복약할 처지가 못 되는 것이 늘 문제다.
 

해가 바뀌고 근 9개월을 정신없이 달려왔고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하나의 업무가 끝나면 두개가 생기는 형편이 야속할 따름이다. 이미 돌아가신 양가 어른들이 생각난다.
 

모두 암, 치매 등 무서운 질병으로 노년을 보내신 분들이다.
 

그 중에도 장인어른께서는 정년을 얼마 앞두고 찾아 온 졸림증을 시작으로 병마에 시달렸다. 별것 아닌 증상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동네병원을 찾았는데, 원장님은 얼른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해 보라는 의견을 내 놓았다.
 

검사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악성 종양이라고 했다. 그렇게 기약 없는 암 투병이 시작됐다.
 

하루같이 몸에 좋은 음식을 소개하고, 특효인 신약이 발견됐다고 하는데 정작 필요한 시기에 요긴한 음식과 약은 없었다.
 

치료 자체가 고통인 항암제 투약으로 건강은 날로 악화됐고, 결국 영예로운 정년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눈물로 공직을 마감하셨다.
 

모든 것이 성격상 일에 묻히길 좋아하시던 결과였다. 경험이 쌓일수록 일이 편하고 수월해질 것 같은 것이 직장생활인데, 꼭 그렇지도 않다. 변화무상한 환경의 변화로 업무 영역은 더 넓어지고, 다양하게 분출는 민원과 과로와 스트레스가 녹녹한 생활을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올 봄에 AI 방역근무를 하다 쓰러진 동료는 아직도 재활 치료 중에 있고, 가정의 달 5월에 쓰러진 동료는 아직도 의식불명이라는 소식이 이 가을에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하나같이 주어진 격무에 불평 한마디 하지 않던 성실한 동료들. 사명감 하나로 몸 바쳐 일한 열정의 결과이기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적당한 휴식과 건강을 돌볼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사정이 녹녹치 않았음은 미뤄 짐작이 간다.
 

가을은 낙엽의 계절. 그래서 헤어짐을 연상하는 쓸쓸한 계절이다. 하지만 한 해의 정열을 마지막으로 붉게 태우는 계절도 가을이다. 이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자축하는 잔치가 시작됐다.
 

그런데 함께 기뻐하고 누려야 할 자리에 초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바로 꽃피는 봄부터 한 몸 던져 일하다 쓰러진 공직자들이다. 가을이 그 사람들에게 명령한다. "그때, 그 기분 그 정열로 벌떡 일어나 병실을 박차고 나오라!"

/박재명 충북도 동물방역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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