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혜영 서원대 교수

[충청일보]추사 김정희의 '고사소요'를 자세히 보게 된 것은 지난해 가을 간송문화전에서다.
 

처음 그림을 볼 때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고 지나쳤는데 똑같이 생긴 그림을 앞에서도 본 것 같아 같이 전시를 보러 간 친구와 두 그림을 왔다갔다 비교해보는 중에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게 됐다. 알고 보니 다른 한 그림은 간송 전형필이 추사의 '고사소요'에 감동을 받아 모사한 것이었다. 원래 '고사소요' 그림 자체에 매료됐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번 주목해서 보고 나니까 계속 그림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김정희의 문인화하면 '세한도'를 곧장 떠올리게 되어서인지 '세한도'와 어딘지 분위기가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나게 해주는 이 그림 속의 선비의 형상이 특히 잊어지지 않았다. '세한도'에서는 소나무, 잣나무가 선비의 높은 절개를 형상화하고 있다면 '고사소요'에서는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나무 사이를 거니는 선비의 모습으로 직접 정신성을 표현하고 있다.
 

선비의 모습은 그림의 구도 전면에 부각돼 있지 않고 기암괴석이 양쪽에 서 있는 숲 속의 나무들 사이로 은근히 드러나고 있으며 얼굴도 정면이 아니라 뒷모습에서 포착돼 이목구비도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옆선으로 표현돼 있다. 붓 터치 또한 바위나 나무는 힘 있고 두터운 선과 가늘고 부드러운 선이 어우러져 다채롭고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선비는 가늘고 단순한 선으로만 표현돼 있다. 하지만 간결한 선으로만 그려진 선비의 실루엣에서는 어쩐지 오묘한 기품과 서두르지 않는 부드러운 여유가 묻어나온다. 뒷짐을 지고 살포시 앞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홀로 오솔길을 거니는 뜻 높은 선비의 모습은 고독해보이긴 해도 외롭거나 쓸쓸해보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지와 움직임이 하나로 어우러진 소요에 젖어들어 자연과 하나가 되는 존재의 지극한 경지를 음미하고 있는 것 같다.
 

기이한 바위와 꼿꼿한 몇 그루 나무 사이로 거니는 군더더기가 모두 제거된 절제된 자태에서 은은히 묻어나오는 만물을 포용할 만하면서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선비의 따뜻하고 맑고 고요한 덕이, 거의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무스름한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경계에 빨려들어 가듯 바닷가 끝자락에 옆으로 가볍게 기울이고 서 있는 한 점 작은 수도승의 몸에서 느껴지던 전 우주를 품을 듯한 깊은 영성과 서로 조응하기 때문인가. 봄바람처럼 사뿐히 완상하는 추사의 선비의 모습을 음미하다보면 자꾸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의 '바닷가에 선 수도승'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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