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숙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정현숙 열화당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현판은 한 건축물이 완공된 후 거는 그 건물의 이름표다.
 

현판의 연원은 기원전 3세기 중국 진(秦)나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칠웅(全國七雄)의 하나였던 진국이 중국을 통일하고 진나라의 시황제는 칠국의 문자를 정리하는 문자통일을 단행했다.
 

이때 문자를 서체와 용도에 따라 여덟 가지로 나눴는데, 그 여섯 번째가 서서(署書) 즉 현판 글씨다.
 

고대에는 글씨 잘 쓰는 사람을 귀하게 여겨 당대의 명필은 명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벼슬을 하사받았고, 황제의 명으로 궁궐의 현판을 썼다.
 

유방의 책사인 소하(蕭何)는 주군이 한나라를 세운 후 만든 궁궐의 현판인 '창룡(蒼龍)'과 '백호(白虎)'를 썼다. 위(魏)나라 2대 황제인 조예(曹叡)는 능운대(陵雲臺)를 완성하고 당대의 명필 위탄(韋誕)에게 '능운대' 현판을 쓰라고 명했다. 남북조와 수나라, 당나라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현판 글씨를 중히 여김은 한결같았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 현판은 8세기 신라의 명필 김생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통일신라 말기의 명필 최치원도 하동 쌍계사 입구 좌측 바위에 '석문(石門)', 우측 바위에 '쌍계(雙磎)'라는 대자를 썼다.
 

19세기 조선의 명필 김정희도 많은 현판 글씨를 남겼다.
 

추사고택 뒷산인 오석산에 있는 화암사 암벽에 '소봉래(小蓬萊)'를 썼다. 제주 유배 길에 초의선사를 방문하기 위해서 들른 해남 대둔사에 이광사의 글씨를 내리고 건 일화로 유명한 '무량수각(無量壽閣)'도 썼다. 유배지인 제주 대정에서 대정 향교에 써 준 '의문당(疑問堂)' 등이 있다. 서울 봉은사에 써 준 그의 절필 '판전(板殿)'은 세상을 뜨기 3일 전에 쓴 대자(大字)다.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목 김충현의 현판 글씨전이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전국의 현판 50여 점을 보여주는 전에 없던 실물 전시라 지금 세간의 주목을 끌고 있다.
 

자료집에는 175점이 실려 있다. 한 작가의 현판 수로는 기록적인 숫자다. 현판 글씨 한 분야만 봐도 그는 한글, 한문의 모든 서체에 능숙하다.
 

그는 역대의 명필들이 주로 썼다는 궁궐 현판을 5점이나 썼다. '사직단(社稷壇)', '건춘문(建春門)', '영추문(迎秋門)', '만춘전(萬春殿)', '문정문(文政門)'이 그들이다.
 

조선의 숙종, 영조, 정조가 사액(賜額)한 서원들의 글씨, 한강대교, 동호대교, 원효대교의 글씨, 김유신 장군과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길상사와 충무영당의 글씨 등 한국 현대사에서 비중 있는 건물에는 어김없이 그의 글씨가 있다.
 

사찰에도 60여 점의 글씨를 남겼다. 특히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금산사, 송광사, 내소사, 구인사, 용문사, 운문사 등의 일주문 글씨를 12점이나 썼다. 이외에도 정계, 관계, 재계, 학계 등 다양한 계층의 지인들에게 써 준 글씨에서 참으로 다양한 서체와 서풍을 구사했다.
 

이는 당시 서단에서 김충현의 높은 위상과 폭넓은 교유를 말해준다. 19세기에 추사 김정희가 있다면 20세기에는 일중 김충현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판에서의 업적만으로도 김충현은 20세기 국필(國筆)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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